만추


만추

淸羅 嚴基昌
개살구빛 햇살들이 미꾸라지처럼
구름 속으로 파고 든다.
잔광이 비늘처럼 잘게 부서지는 하늘로
제비 한 마리 높이높이 차올라
몇 올 빛가루를 줍고 있다.
점점 낮아오는 北天의 껍질 밑으로
야윈 풀벌레 울음이 흐르고
부리 끝이라도 부빌 溫氣를 캐러
구름 속으로 들어간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떨고 있는 빨래줄마다
노랗게 돋아나는 한숨
눈물이 흔한 단풍나무가
화장을 지운다.
posted by 청라

제주해협


제주해협

淸羅 嚴基昌
섬들의 발꿈치를 벗어나자
바다는 막막하게 지워져버린다.
북빙양을 돌아온 흰 말떼들도
보이지 않는다.
푸른 물살에 담긴 하늘의 음성 속으로
발자욱을 찍으려 하루내내 오르내리던
갈매기 노래소리도 보이지 않는다.
소금기 서걱이는 검은 바람에 쫓겨
사람들은
좁은 선실 속으로 숨어들고
하늘과 맞닿은 광막한 여백
멈춘 시간 속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먼 섬 기도로 반짝이는 불빛이여!
가보지 목한 곳의 따스한 이야기들이
불빛을 통해 건너오니
어둠은 나를 지우지 못했구나
텅 빈 공간 속에 말간 공기로
허허로운 어둠으로 녹아들지 못했구나
저녁에 마신 한잔의 소주 열기로
몽롱히 가라앉는 人事의 그림자
검은 장막을 접고 배는 달리고
새벽이 오면
댓순처럼 청청히 일어설 바다의 음악처럼
나의 무릉도원은 짜릿하게 가까워온다.
posted by 청라

얼룩


얼룩

淸羅 嚴基昌
비어 있는 하늘이
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러기 한 마리
그리고 지나가는 하얀 금 위에
그리운 자장가 소리 철렁대며 걸리고
천 가닥 넘어 쏟아지는 달빛 이랑
이제는 아무도 올 수 없는 길로
어릴 때 내 빈 몸 빈 마음의
작은 날개들이
푸득대며 날아오르는 청랑한 소리.
비어 있는 하늘이
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밤새워 짠 베틀로는
한 파람의 겨울도 막을 수 없는
귀뚜라미의 허전한 발
걸어가는 발 밑에 눈뜨는
자잘한 이야기들이
진하디 진한 얼룩으로 남는다.
posted by 청라

풍경


풍경

淸羅 嚴基昌
찢어진 꽃잎처럼
나비 한 마리
길 가운데 누워
파닥이고 있다.

구둣발 하나
나비를 밟고 지나간다.
구둣발 둘이
나비를 밟고 지나간다.
비명을 묻히고 무심히 돌아가는
구둣발
하나

셋......

동양백화점 피뢰침에
죽지를 꿰어 주저앉은 낮달
기침하는 도시를 비추다
골목으로 눈을 돌리면

나비의 문신 가슴에 새긴
내게서만
나비는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posted by 청라




淸羅 嚴基昌
박꽃 아래엔
박꽃만한 그늘이 하나 버려져 있다.
어둠의 갈매기들이
눈부시게 하얀 알을 낳는다.
은밀한 세상을
투명하게 벗겨내는 달빛의 바다
외로운 섬 하나 남아
진초록 비밀을 가꾸어 있다.

달빛이 수평으로 파도쳐 온다.
펄렁 젖혀진 기슭에
숨죽여 누워 있는
비밀의 속살이 보인다.
가냘픈 대궁이 위태로운 섬
풀려진 달빛 속에 묻혀 있는 섬
지켜야 할 어둠으로
포만한 배를 끌고 길게 누워 있다.
posted by 청라

山水圖


山水圖

淸羅 嚴基昌
꾀고리 울음소리가
개나리꽃 가지에 불을 붙이고 있다.
햇살이 양각으로 박아 놓은 老翁의 낚시 끝에는
청청한 산그림자가 걸려 있고
누군가 넘어 오라는
아스라한 고갯길 따라
저녁 연기로 골골이 잦아드는
저녁 골안개.
버들강아지 줄기로 서서
조롱조롱 열린 귀에는
온종일 골물 소리만 들려오고
투명하게 벗어 오히려
속 깊은
하늘 한복판에
예닐곱살 소녀의 투정처럼 피어난
맨드라미만한 구름 한 송이
posted by 청라

후리


후리

淸羅 嚴基昌
한 개의 줄 끝에 걸리는 바다
거대한 뚝심
어잇차. 어잇차.
가는 실을 타고 들어와
내 허망한 마음 받쳐 주는
그대 사랑의 똑딱선 소리.

그물을 던질 때에
빛나며 가라앉는 우리들의 꿈
눈시리게 투명한 바다의 속살
어둠처럼 막막한 바람기를 옭으면
어잇차, 어잇차,
먼 수평 푸른 달빛 아래
바다의 꼬리에서 이는 하이얀 풍랑.

사람들의 마음마다 풍랑이 울면
한 끝씩 접혀가는 바다의 투지
힘주어 딛고 있는 힘줄이 끊어지며
달빛 아래 퍼덕이는 절망의 바다.
어잇차, 어잇차,
지난 겨울 춤추던 폭풍의 칼날이 눕고
몇 사내가 버리고 간 유언이 빛나고
끌려온 바다는
우리들의 발밑에 헐떡이고 있다.

*후리 : 강이나 바다에 넓게 둘러친 후에 그물 양쪽에서 여러 사람이 끌줄을 잡아당겨 물고기를 잡는 큰 그물


posted by 청라

山村


山村

淸羅 嚴基昌
少女 하나가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이른봄 물기 오른
종아리에
흥건히 배어 오르는 경쾌한 리듬

폴짝
포올짝
뛸 때마다
아지랑이처럼 증발하여
산 그림자 속으로 잠적한다.

애동솔 숲에서 우는
꾀꼬리 울음
안개처럼 날리는 산 벚꽃 잎새

풀숲에서 소녀의 리본이 하나
나풀거리며 나풀거리며
놀 젖은 하늘로 날아간다.
posted by 청라

아침 노을


아침 노을

淸羅 嚴基昌
힘센 새들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햇살의 바다로 가고
떠나간 새들이 버리고 간
어둠 뒤에서
작은 새야,
너의 울음 너머로 보는 아침 하늘은
깨어지기 쉬운 평화로구나!
산작약 한 송이
지키고 있는 보랏빛 그늘
별그림자 발 담근 옹달샘에
얼비치는
부리가 노오란 노을
노을……
posted by 청라

K 화백 화실 풍경


K 화백 화실 풍경

淸羅 嚴基昌
K 화백 화실 문을 연다.
스물세마리 십자매가
일제히 울고
그 밑으로 한 잔의 수돗물,
화백의 귀는
반쯤 먹다 남은 배추 잎사귀
사철나무 뒤로 저무는 어둠을 풀어
몸 속을 치고 지나가는
천둥 소릴 꾸며 놓는다.
아련한 산 그림자가
쉽게 서지 않는 도화지 위엔
떠오를 듯 떠오를 듯
가라앉는
곡선이 하나
아삼한 봄 하늘의 살 밑으로 배어 들고....
한 잔의 수돗물
계곡으로 돌 돌
연두빛 생명 굴리는 십자매 울음
그 울음 소리로도
일어서지 않는
산……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