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에서

 

 

물소리 그리다가

오수午睡에 잠긴 날에

 

풀 바람 꽃향기도

붓질 없이 숨결 틔워

 

도화지

맑은 여백엔

산이 풍덩 빠져 있다.

 

 

201`8. 5, 30

posted by 청라

진짜 부부

수필/서정 수필 2018.05.26 09:33

진짜 부부

 

 

  송 교장이 오늘 따라 모임에 늦었다. 매 번 먼저 나와 기다리던 사람이 20분이나 늦게 나왔기에

  “아니, 자네도 늙었나 보네. 이렇게 늦는 걸 보니

 하고 농을 건네니

  “어머님 모시고 서울 병원에 다녀오느라 늦었네. 노인양반이 어찌나 끈질기던지.”

  “무슨 소린가?”

  “아버지 말이야. 평소엔 어머니를 잘도 구박하고, 싸우고 하던 양반이 의사선생이 괜찮다는데도 눈물을 글썽이며 별별 데 다 검사하라고 졸라서 늦었다네.”

  송 교장 말을 듣다 보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따듯한 것이 차올랐다. 그래 부부란 저래야 되는 것이다. 평소엔 삶의 재미로 자글자글 싸우다가도 어려움에 처하면 몸이 부서져라 달려들어 도와주는 것. 나의 반쪽이 고통스러우면 나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그 것을 해소하려 온 힘을 다하는 것.

  잔잔한 감동에 취하다 보니 또 다른 어떤 부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아프게 한다. K교장선생님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다. 늦게 상처를 한 후 자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여 년 연하의 여자와 재혼을 했다. 새 부인이 교장선생님께 정말 잘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속의 아쉬움을 달래며 행복하게 살기를 빌었다.

  그런데 그 분이 몹쓸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두 번이나 수술을 하고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데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새 아내의 태도가 돌변해 교장선생님을 구박한다는 것이다. 내 후배가 찾아갔을 때도 교장선생님이 병원에 다녀왔다고

  “아니, 늙은이가 빨리 형이나 따라갈 것이지 병원에는 왜 가? 쓸 데 없이 돈만 없 애고.”

  하면서 구박을 했다는 것이다. 죽을 것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1%의 소망이라도 갖고 싶은 것이 사람이 아닐까? 그 여자가 만일 조강지처糟糠之妻였다면 애들의 아버지요 평생의 반려자의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내던지고 말았을까. 마음의 반을 접어 내 반쪽의 몸에 끼워놓고 아픔도 기쁨도 함께하는 것이 진짜 부부가 아닐까.

 

    부부

 

나는 언제나

마음의 반을 접어서

아내의 마음 갈피에

끼워놓고 산다

더듬이처럼 사랑의 촉수를 뻗어

심층 깊은 곳에 숨겨진

한숨의 솜털마저 탐지해 내고

아내의 겨울을 지운다

어깨동무하고 걸어오면서

아내가 발 틀리면

내가 발을 맞추고

내가 넘어지면 아내가 일으켜주고 

천둥 한 번 울지 않은

우리들의 서른다섯 해

사랑하고 살기만도 부족한 삶에

미워할 새가 어디 있으랴.

 

  요즘 들어 아내가 자주 손이 저리다고 한다. 특히 잠을 잘 때 그 증상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아내가 신음 비슷한 소리를 하면 나는 잠결에도 자동적으로 아내의 팔을 주무른다. 목뼈에 협착증세가 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내의 손을 주물러주다 보니 옥처럼 곱기만 하던 손이 참 만이도 상하였다. 한복을 한다고 늘 바늘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주름살로 가득 앉은 손에 온통 바늘로 찔린 자국이다. 아내의 손끝은 성할 날이 없다. 손가락에 반창고가 흥부네 이불처럼 기워져 있다. 어느 날 그 손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제 그만 집에서 쉬라고 했더니 일을 갖는 것이 몸은 고되어도 마음이 행복하단다. 등을 두드려주다 어깨를 만져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짝 야위었다. 더듬이 한 끝 아내의 몸속에 남겨두고 관심을 쏟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2018. 5. 26

 

 

posted by 청라

튤립 사랑

시/제5시집 2018.05.18 10:17

튤립 사랑

 

 

! 나는 튤립 꽃밭에서

한동안 숨을 멈추었네.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줄기를 위로만 곧게 세워

태양보다 더 뜨겁게 피워 올린

단 한 송이 튤립의 사랑

 

그래, 사랑은

한 송이만 피우면 되는 거야.

 

한 삶의 곧은 줄기엔

온 생애를 태워

진액만으로 빚어낸

오직 진실한 한 송이만 피우면 되는 거야.

 

절규絶叫보다 더 붉은

튤립의 꽃 바다에서

온 몸을 떨고 있었네.

 

 

2018. 5. 18

posted by 청라

[지역문인탐방](20)시인 엄기창

25년 쉼없이 詩창작… 정제된 언어 호평

최진섭 기자 heartsun11@cctoday.co.kr  2003년 11월 12일 수요일 제14면     승인시간 : 2003년 11월 12일 00시 00분
충남 공주 출생으로 25년여의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꾸준히 시 창작 활동을 펼쳐 온 시인 엄기창 선생은 1974년 시문학사가 주최한 제1회 전국 대학생 시 모집에서 '아침서곡'이라는 창작시를 통해 당당히 장원을 차지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현실로 옮기게 됐다.

그는 다음해인 1975년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또다시 시문학사에 '아침바다'를 응모해 당선되며 문학계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됐다.

이후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 시 창작을 위한 고뇌의 이슬을 마시는 등 정열적인 문학사랑을 키워 갔다. 쉽게 만들어진 시는 오래도록 독자의 마음에 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수십편의 시를 몇번이고 썼다 지우며 만족할 만한 시를 얻을 때까지 쉼없이 창작에 몰두했던 그는 1994년이 되어서야 첫 시집 '서울의 천둥'을 발표하게 됐다.

이렇듯 한 작품 한 작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는 공을 들여서 일까, 그의 첫 시집은 출간 당시 '언어의 경제적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물론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그는 첫 시집 발표 후에도 각종 문예지에 끊임없이 창작시를 게재하는 등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두번째 시집은 내년쯤에나 발표할 예정이다.

여기저기 게재한 작품과 현재 집필해 놓은 작품이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하기에는 충분하지만 한번 더 걸러야 하는 작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올겨울 두번째 시집에 수록할 작품들을 정리할 계획이며 두번째 시집 출간과 함께 첫번째 시조집도 발표할 예정이다.


posted by 청라

고향

 

 

복사꽃 피었다고

다  고향은 아니더라.

어머니 미소를

산에 묻고 돌아온 날

고향도 뻐꾸기처럼

가슴에서 날아갔다.


떠올리면  향내 나는

어머니가 고향이지.

타향에서 지친 날개

쉴 곳 없는 저녁이면

달밤에 손 모아 비시던

정화수井華水로 다독였네.

 

 

2018. 5. 5

posted by 청라

윤사월

 

 

범종소리 쾅 하고

골짜기 울리면

번뇌처럼 온 산 가득

날리는 송홧가루

동자승

빗자루 들고

삼고三苦

쓸고 있다.

 

 

 

삼고三苦 : 의 인연으로 받는 고고苦苦

즐거운 일이 무너짐으로써 받는 괴고壞苦

세상 모든 현상의 변화가 끝이 없음으로써 받는 행고行苦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