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시/제7시집 2024. 10. 29. 08:34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세상일들이

바싹 마른 북어 맛처럼 밋밋해지면

자작나무 숲으로 가자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하늘 끝에 팔랑대는 잎새들이 불타는 색깔로

옷을 갈아입듯이

사랑이 메말랐던 내 가슴에도 단풍이 익는다네

 

오오, 천둥이여

자작나무에 기대어 가을을 안아주면

쿠르릉 쿠르릉

몸속에서 일어서는 천둥이여

 

오랫동안 시들었던 젊은 날의 열정과

세월에 속아서 차갑게 식었던 사랑이

봄풀처럼 손들고 일어서는 아우성이여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려서

미워했던 사람들과 부둥켜안고 같이 울고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하는

눈물 많은 나를 찾았다네

 

산이 속삭이는 말을 알아듣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젊어져서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를 찾았다네

 

posted by 청라

하일夏日 귀향歸鄕

시/제7시집 2024. 10. 3. 10:19

하일夏日 귀향歸鄕

 

 

골목은 사막처럼 비어있었다

분꽃 같던 아이들 웃음소리 다 떠나가고

집집마다 노인들

삭정이 마른 기침소리만 남아있었다

회재를 넘으면 언제나

된장찌개 냄새 마중 보내던 어머니

옛집 마당가에 돌절구로 서있고

저녁이면 밥 먹으라 부르던 정다운 목소리에

별 촘촘 달던

감나무 묵은 둥치엔 허기진 꿈들만 무성했다

그리운 얼굴들 하나씩 소환하며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추억은 늦여름 파장처럼 비틀거리는데

사람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 대문 닫히고

한 집 대문 닫히면 한 역사에 거미줄이 그어지고

풀들만 웃자란 건너 마을 초등학교에선

언제 또 담임 선생님처럼 종소리가 부르려는지

낯선 언어들로 삭막해지는

어린 날 손때 희미해진 거리에 가슴을 치며

홍시처럼 노을만

소멸되어가는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posted by 청라

산을 마시다

시/제7시집 2024. 9. 27. 10:15

산을 마시다

 

 

아침 인사를 하려고

창밖을 보니

산은 가을 안개에 안겨있다

 

붙어산다고 꼭 정다운 것은 아니다

멀리서 손에 잡힐 듯 타오르는 초록을

한 모금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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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에 묻혀 있어도 산과 한몸이 되면

마음속에서 샘물이 솟는다

 

외로운 사람에겐 꾀꼬리소리를 보내주고

고달픈 사람에겐

고촉사 목탁소리를 보내 달래주고

 

세상의 바람소리 잠재운 내 가슴의

둥지에

이름 모를 새는 알을 낳는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