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사월

 

 

태화산 골물소리에  송홧가루 날린다.

뻐꾸기 노래에도 노란 물이 들었네.

술잔에 담아 마시네. 내 영혼을 색칠 하네.

 

다람쥐 한 마리가 갸웃대며 보는 하늘

무엇이 궁금한가 연초록이 짙어지네.

온종일 앉아있으니 내 손 끝에 잎이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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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오월

 

 

아이들 웃음소리가

이팝꽃을 피우고 있다.

리모델링을 한 거리로

도솔산 뻐꾸기 소리 

 내려오면

주문呪文처럼 조롱조롱 피어나는

황홀한 예감

오래 닫혀있던 그 사람 

마음의 창이 열릴까.

 

 

2017, 5, 6 

문학사랑124(2018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이팝꽃 핀 날 아침

이팝꽃 핀 날 아침

 

 

이팝꽃 핀 날 아침엔

당신의 창가에 커튼이 내려져도

서러움이 덜할 것 같다.

 

가로등 일찍 꺼진 거리에

수많은 꽃잎들이 불을 밝히고

안개처럼 흐르는 향기

 

도솔산 뻐꾸기 소리 한 모금

커피에 타서 마신다.

온몸으로 번져가는 나른한 행복

 

하루 종일 바람이 불어

꽃이 다 지지 않는 한

닫혀 진 커튼 더 활짝 열리겠지.

 

아직 잠들었던 작은 봉오리마다

황홀한 예감들이 깨어나고 있다.

 

 

 

 

posted by 청라

바람에게

바람에게

 

 

잎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아라.

심어놓고 흔들어대는데

잎 필 겨를이 어디 있으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눈 흘기지 말아라.

뿌리가 다 말라가는데

꽃 피울 정신이 어디 있으랴.

 

열매 맺지 않는다고

소리치지 말아라.

꽃도 못 피웠는데

열매 맺을 사랑이 남아 있으랴.

 

 

posted by 청라

봄날의 오후

봄날의 오후

 

 

지난가을 계족산 고갯길에

누군가 낙엽을 모아

큰 하트를 장식해 놓았다.

 

저마다 화려한 가을의 빛깔들이

사랑의 무늬로 반짝이고 있었다.

 

겨우내 사나운 바람 다녀간 후

산산이 깨어졌을 사랑의 파편을 생각하며

산길을 올랐다.

 

땅에 뿌리라도 박은 것일까

옷깃 하나 흩트리지 않은 하트의 품속에

종종종 안겨있는 조그마한 하트들

 

, 큰 사랑이

또 다른 작은 사랑들을 낳는구나.

사랑으로 이어진 마음과 마음들이

긴 겨울을 이겨내었구나.

 

큰 하트를 만든 사람과

작은 새끼들을 안겨준 사람들의 사랑을

벚꽃들 환한 등불 켜고 지켜보는 봄날의 오후.



대전문학76(2017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붉은 모자를 쓴 부처님

 

 

누군가 빨간 모자 하나

돌부처님 머리 위에 씌워놓고 갔다.

벚꽃이 활활 타오르던 날

나는 부처님과 어깨동무를 했다.

마음속으로 팔랑팔랑

꽃잎이 몇 개 떨어졌다.

견고한 어깨에서 전해지는

이 따스한 전율

목탁 소리도 끊어졌다.

불법을 덮어버린 삐딱한 빨간 모자

나는 부처님과 친구가 되었다.

되나 안 되나 불질러버린 봄 때문에

 

 

2017. 4. 5

posted by 청라

세월

세월

 

 

처녀 시절엔 오빠 오빠

결혼 후엔 아빠 아빠

 

육십 넘자 방귀 뿡뿡

거실에서 속옷 바람

 

오빠는

사라져버리고

아빠만 남아있다.

 

 

2017. 3. 16

posted by 청라

국민에게 考함

국민에게

 

 

고주배기는

도끼로 힘껏 찍어야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 스스로 안으로 썩고 썩어

마침내 삶의 의욕마저 다 잃었을 때

어린아이의 툭 차는 발길질에도

힘없이 대지 위에 널브러지고 만다.

 

나라는

외적外敵이 강해서

쓰러지는 것이 아니다.

핏줄끼리 스스로 싸우고 싸워

증오와 갈등으로 곪고 곪았을 때

총 몇 자루만 들고 들어가도

모두 손들고 마는 것이다.

 

 

2017. 3. 10

 

posted by 청라

신문 안 보는 이유

신문 안 보는 이유

 

 

신문 칸칸마다 오 할은 소설이다.

참신한 허구다 흥미 만점이다

제 엄마 찌찌 본 것도 동네방네 소문낸다.

 

공정성 정확성은 개에게나 줘버려라

박수 치는 사람이 많으면 장땡이지

촛불에 기대다 보면 특종 하나 건질 걸

 

나라야 망하던 말 던 무엇이 대수던가

양심의 곁가지에 벌집 하나 지어놓고

솔방울 떨어만 져도 온 벌통 다 달려든다.

posted by 청라

슬픔을 태우며

엄기창론 2017. 2. 24. 07:30

슬픔을 태우며

                                      엄 기 창


 

미루나무 그림자가 노을 한 자락 걸치고 있는

금강 변에 서면

품고 온 슬픔이 없는데도 가슴에서 피가 난다.

 

착한 것도 죄가 되는가!

 

백제의 산들은 왜 모두 모난 데 없이 둥글기만 해서

적군의 발길 하나 막지 못한 것이냐.

 

나라 없는 백성들은 질경이처럼 짓밟혀서

꺾여도 꺾여도 옆구리에서 꽃을 피운다.

 

역사의 속살을 가리려고

바람은

투명한 수면에다 주름을 잡아놓는가.

 

짠한 눈물 몇 종지 스스로 씻어내며

세월의 골짜기를 흐르는 금강

 

강변에 불을 피우고

남은 슬픔 몇 단 불 속에 던져 넣는다.


약력 

1975시문학으로 등단.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시집 서울의 천둥』 『가슴에 묻은 이름』 『춤바위

시조집 봄날에 기다리다

<대전문학상> <호승시문학상> <하이트진로문학상> 대상 <정훈문학상> 대상

<대전광역시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시작 노트

 

나는 백제라는 이름만 읊조려도 눈물이 난다. 역사 속에서 사라질 때 슬프지 않은 나라가 있겠느냐만 공주나 부여에 가면 유독 슬픈 전설이 많고, 어린 시절부터 그런 전설에 묻혀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면 백제의 얼굴 표본이라 한다. 둥글둥글 모난 데 없이 원만한 게 서산 마애불이나 석불들의 모습과 닮았단다. 문화재 속에 드러난 백제인의 얼굴들은 모두 더없이 친근감 있고 평화로운 모습인데 왜 백제의 역사는 비극으로 인식되는 걸까. 아마도 3국 중에 제일 먼저 망한 나라가 백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백제에 관한 시를 몇 편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맨 첫 번째 쓴 시가 이 슬픔을 태우며이다. 열 편 쯤 만들어 다음 시집에 펴내고 싶다. 슬픔을 태우고 백제의 전설들을 그들의 얼굴처럼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