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서루의 달

죽서루의 달

 

 

동해에서 막 건져 올린 달이

겹처마 맞배지붕에 앉아 있다

 

죽서루 달빛에서는

천 년의 이끼 같은 향기가 난다.

 

삼척 사람들

오래 가는 사랑처럼

 

파도 소리에 삭히고 삭혀

만삭으로 익은 달

 

오십 여울 돌아 달려온 태백산 물도

죽서루 달빛에 취해

밤새도록 절벽을 오르고 있다.

 

 

2020. 8. 26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

장마

시조/제3시조집 2020. 8. 18. 21:08

장마

 

 

하늘의 숨결 모아

대청호는 만삭이다.

 

어릴 때 묻고 떠난

내 풋사랑 익었을까

 

그리움 연꽃으로 올라

대청호는 순산이다.

 

 

2020. 8. 18

posted by 청라

자화상

자화상

 

 

내 가슴엔 여백이 많아

채울 것도 많았지.

사하촌寺下村에 살면서

새벽에 떠내려 온 풍경소리 건지면서

부처님 미소를 마음에 심었네.

 

부처님과 가장 닮은

아이들과 살고 싶어서

나라 말을 공부했네.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세월 가는 줄도 몰랐네.

 

친구들은 나를 보고 부처라 하고

제자들은 나를 보고 스승이라 했지만

나는 부처도 스승도 되지 못했네.

 

세월의 바퀴에 감겨

이만큼 지나와서 생각해보니

삶의 폭풍 속에서도 나를 견디게 해준 건

반짝이는 몇 편의 시

 

나는 이제 사람들에게 기쁨이며

행복이 되려 하네.

서툴지만 진실한 마음을 담은

나의 노래로.

 

 

 

posted by 청라

내가 사랑하는 공주

 

 

공산성에서 가을에 취해 있다가

금강으로 와서

얼굴을 비춰보면

 

내가 걸어온 발자국들도

코스모스 꽃씨만한 역사가 될까.

 

공주 거리를 걷다가 보면

은행잎처럼 밟히는 게 다 역사다.

 

석장리 유적지엔

못 다 이룬 구석기 시대의 사랑

무령왕릉에선 백제의 웃음소리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의 눈빛에서도

이끼처럼 푸르른

역사의 향기가 풍겨오고 있다.

 

금강교를 건너서

공주의 품에 안긴 사람들은

공주에 취해서 모두 공주 사람이 된다.

 

2020. 8. 4

 

 

posted by 청라

엑스포 과학공원

 

                                  제3

 

 

한빛탑에 올라가면

한 줄기 빛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길이 열리고

 

음과 양이 회전하는

태극 문양이

세계로 웅비하는 대한민국의

꿈과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보라

여기는 구십삼 년

대전세계박람회가 치러졌던 곳

 

민족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경제, 과학 강국으로 우뚝 선 것은

대전엑스포가 밀알이었지.

 

우리의 새로운 도약은

여기로부터 힘차게 태동하였는가.

 

청년들이여!

와서 꿈을 키워라.

세계의 주역이 되는 웅대한 꿈을.

 

 

2020. 7. 11

e-백문학3(2020)

 

posted by 청라

식장산 자연생태림

 

 

산이 높아서

오르기 어렵다고 말하지 마라

 

대전에서 제일 먼저 해가 뜨는 곳

 

고란초

고라니 울음

품어 키우는 곳

 

길이 있어서

고요가 깨진다고 말하지 마라

 

산사의

목탁소리는

큰 소리로 울릴수록 골짜기가 숙연해진다.

 

주엽나무 속삭이는 바위에 앉아

녹음 차오르는 숲을 바라보면

! 세상은

한 발자국만 돌아서도 피안인 것을

 

 

2020. 7. 17

e-백문학3(2020)

posted by 청라

장태산 휴양림             

 

                    

반듯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와서

메타세콰이어 숲을 보면 알지

 

줄지어 도란도란 살아가는 것도

하늘만 보고

굽힘없이 살아가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스카이웨이 올라

출렁다리에서 몸을 흔들어 사념을 털고

녹음에 묻혀 세상을 보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근심 있는 사람들 와서

장태산 맑은 바람에 근심을 씻게.

비단처럼 고와진 마음의 결에

새 소리 별처럼 총총 심어가면

 

어제까지 등돌리던 사람에게도

웃는 얼굴로

살며시 손을 내밀게 되리.

 

 

2020년 8월

e-백문학3(2020)

 

 

posted by 청라

일식日蝕

일식日蝕

 

 

아이들 웃음소리

가득하던 운동장에

반달만큼 모인

아이들

 

느티나무에 앉은 까치들이

아이들과

수 싸움을 하고 있다.

 

달그림자 해를 가리면서

어둑해진 시골 학교

 

육십 년 만에 찾아왔더니

내년엔

폐교한단다.

 

 

2020. 8. 3

posted by 청라

온 세상 밝히는 등불처럼…

엄기창 관련 기사 2020. 7. 7. 18:32

온 세상 밝히는 등불처럼…

  •  최일 기자
  •  승인 2020.07.06 17:10
  •  

엄기창 시인, 시조집 ‘거꾸로 선 나무’ 출간

 

꽃 피면 오마하고 손 흔들며 떠난 사람
물에 지는 꽃 그림자 쑥국새만 울고 가네
그리움 먼 하늘가에 구름으로 나부낀다

-‘그리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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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창 시인

코로나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세상은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정의롭지 않은 이가 정의를 앞세우고, 오물 범벅인 권력자가 위세를 떨친다.

어수선한 시절, 세월에 떠밀린 시인은 어느새 고희(古稀)의 고개에 접어들었고, 그는 거꾸로가 아닌 바로 선 나무를 꿈꾸며 세상을 관조(觀照)한다. 닫힌 마음을 다시 열고, 상처를 치유하는 노래를 한다.

청라(淸羅) 엄기창 선생이 2020년 여름 시조집 ‘거꾸로 선 나무’(오늘의문학사)를 출간했다. 지난 2016년 ‘봄날에 기다리다’에 이어 4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조집이다.

자신의 시조(時調)가 산골 물소리처럼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노래였으면 좋겠다는 그는 1부 ‘내 마음의 꽃밭’, 2부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3부 ‘참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4부 ‘미소가 따라와서’, 5부 ‘고희(古稀) 고개에서’ 등으로 구성된 이번 시조집에 ‘능소화’, ‘가시연’, ‘설일(雪日)’, ‘서해의 저녁’, ‘춘일(春日)’, ‘생가 터에 앉아’, ‘황혼 무렵’, ‘세월의 그림자’, ‘자연법’, ‘코로나에 갇힌 봄’ 등 총 90편의 작품을 담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마음이 흐르는 대로 강물처럼 흘러가고 싶다는 청라 선생은 슬픈 사람에게는 위안을, 기쁜 사람에게는 더 큰 환희가 되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시조를 독자들에게 선물하며 절절한 그리움을 전한다.

충남 공주가 고향으로 1975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은 대전문인협회 시분과 이사 및 부회장, 문학사랑협의회장 등을 역임했고, 대전시문화상·정훈문학상·대전문학상·호승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 ‘서울의 천둥’, ‘춤바위’, ‘세한도(歲寒圖 )에 사는 사내’ 등이 있다.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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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라

갈대와 나팔꽃

 

 

한 길 넘게 자란 갈대를 감아 올라가

나팔꽃이 방끗 피었습니다.

갈대는 압니다.

저 환한 웃음이

나팔꽃의 미안한 마음이라는 걸

갈대는 잎을 내밀어

나팔꽃이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바람이 붑니다.

모든 갈대들 휘청거릴 때

나팔꽃은 살며시 갈대를 안아줍니다.

흘러가는 물은 알까요.

아주 작은 것끼리도 서로 손을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2020. 7. 5

고마문학창간호(2020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