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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설吹雪
마을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섬처럼 조그만 집 하나 있습니다. 비어있는 도화지처럼 온 세상은 눈 덮여 하얗고, 길 끊어진 이웃은 십리보다 멉니다. 눈보라가 파도처럼 넘실거립니다. 울타리가 지워지고, 사립문이 지워지고, 위태롭게 서 있던 작은 집도 붓질 한 번에 지워집니다. 온 세상이 지워진 도화지 위에 등대인가요, 장밋빛 불빛 비친 창문만 화안합니다.
세월이 머리위에 눈빛으로 앉은 할머니는 저녁 상 위에 모주 한 병을 올려놉니다. 참나무 울타리로 으르렁 으르렁 눈보라가 지나가는데, 상관없지요. 할머니, 할아버지 부딪치는 잔에는 흥이 익어 얼굴은 먹오디 빛입니다. 할아버지는 추억의 갈피 속에서 가장 정다운 콧노래 뽑아내어 흥얼거리고, 할머니의 몸은 조금씩 흔들립니다. 타지로 나간 자식들 목소리 기다리다 수화기 위엔 뿌옇게 먼지가 쌓였지만, 신명이 물오른 할아버지 눈가엔 섬처럼 외로운 외딴집 겨울밤도 할머니 하나 있어 향연饗宴입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길마다 가려주는 취설吹雪도 포근한 수막繡幕입니다.
2010.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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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산-봄
비 그치자 보문산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골안개 분칠하는 산기슭 따라 돌며
바람이 실가지마다 붉은 연지 찍고 있다.
회색빛 산색 속에 연초록이 묻어난다.
조용한 떨림으로 일어서는 소리들이
바위 틈, 낙엽 아래서 함성으로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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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구봉산 산행 길에
단풍잎 하나 따서
아내의 화장대에
몰래 올려 놓았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내 가을 편지이다.
얼핏 연 책갈피에
내게 보낸 연서 한 장
곱게 말린 단풍잎에
배어있는 고운 정성
아내도 날 사랑한다는
홍조 어린 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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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까치
늦은 아침
아이들 놀이터 벚나무 위에서
까치가 요란스레 울고 있다.
아파트 문은 모두 닫혀있고
유치원도 못 갈 어린애 혼자 듣다가
모래만 뿌리고 심심해서 돌아갔다.
맑은 아침 햇살 물고 와
자랑스럽게 울고 있는 까치야
우리 마을엔 네 울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 아무도 없다.
생활에 쫓기는 도회지 사람들에겐
반가운 사람이란 아예 없는데
반가운 손님 온다고 아무리 울어봐라.
한나절 소식 전하다 지쳐
비둘기들 사이에 섞여 모이나 주워 먹다
자동차 경적에 놀라 비명처럼 쫓겨가는
비둘기의 날개 너머로
너무도 눈시린 가을…….
200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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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m
당신들의 그 새벽엔
하나님도 조상들도 아무도 없었다.
새벽 산책길, 3m 간격
그것이 삶과 죽음의 거리였다.
길 건너 도솔산이
부르는 대로
아내는 웃으며 도로로 들어서고
하늘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15m를 날아
아스팔트 바닥에 산산이 부서졌다.
너무도 맑아 바라보기도 아깝던
한 송이 짓이겨진 코스모스 꽃이여
피 묻은 향기는 하늘하늘 날아
먼 길을 가고
남은 사람의 앞길에
가로놓인
저 막막한 사막
새벽 산책길, 3m 간격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였다.
2009.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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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되기 위해
관음봉
꼭대기에 올랐다.
사랑, 미움 구름으로 날린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재어보던 그만큼
하늘은 더 높아졌지만
산 위에 다섯 자 반쯤
키를 보탰으면
입 다물고 산이 되어야지.
이름표를 떼고
장송 옆에 서서
내 마음 아궁이에 초록 불을 지핀다.
2009.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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