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村


山村

淸羅 嚴基昌
少女 하나가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이른봄 물기 오른
종아리에
흥건히 배어 오르는 경쾌한 리듬

폴짝
포올짝
뛸 때마다
아지랑이처럼 증발하여
산 그림자 속으로 잠적한다.

애동솔 숲에서 우는
꾀꼬리 울음
안개처럼 날리는 산 벚꽃 잎새

풀숲에서 소녀의 리본이 하나
나풀거리며 나풀거리며
놀 젖은 하늘로 날아간다.
posted by 청라

아침 노을


아침 노을

淸羅 嚴基昌
힘센 새들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햇살의 바다로 가고
떠나간 새들이 버리고 간
어둠 뒤에서
작은 새야,
너의 울음 너머로 보는 아침 하늘은
깨어지기 쉬운 평화로구나!
산작약 한 송이
지키고 있는 보랏빛 그늘
별그림자 발 담근 옹달샘에
얼비치는
부리가 노오란 노을
노을……
posted by 청라

K 화백 화실 풍경


K 화백 화실 풍경

淸羅 嚴基昌
K 화백 화실 문을 연다.
스물세마리 십자매가
일제히 울고
그 밑으로 한 잔의 수돗물,
화백의 귀는
반쯤 먹다 남은 배추 잎사귀
사철나무 뒤로 저무는 어둠을 풀어
몸 속을 치고 지나가는
천둥 소릴 꾸며 놓는다.
아련한 산 그림자가
쉽게 서지 않는 도화지 위엔
떠오를 듯 떠오를 듯
가라앉는
곡선이 하나
아삼한 봄 하늘의 살 밑으로 배어 들고....
한 잔의 수돗물
계곡으로 돌 돌
연두빛 생명 굴리는 십자매 울음
그 울음 소리로도
일어서지 않는
산……
posted by 청라

아침 바다


아침 바다

淸羅 嚴基昌
하얀 돛단배가
아침의 건반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파도에 몸을 던지고
잊었던 리듬을 생각하는 갈매기.
쾌적한 바람이 햇살 층층을 탄주한다.
미역 숲에서 멸치 떼들이
오선의 층계를 올라간다.
갈매기 노란 부리가
번득이는 가락을 줍고 있다.

밤내 뒤척이던
허전한 어둠의 꿈밭
소라껍질이 휘파람 불며
모래알 손뼉을 쳐 뿌리고 있다.
얼비친 하늘의 푸른 물살을 타는
갈매기 눈알에
잊었던 리듬이 내려앉는다.
하늘 속의 빛이랑이 내려앉는다.
posted by 청라

낚시터에서


낚시터에서


淸羅 嚴基昌
江心에 줄을 던지고 호흡을 멈춘다.
원래 거기 있었던 듯
하늘과 산과 강물로 숨쉬는
하나의 바위가 되기 위해서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세월에
발구르지 않고
강바람에 눈 귀 닦으며
파란 물소리에 마음을 빨면

빈 바구니에
달빛만 가득 채워도
세상을 늘 사랑할 수 있다.

흔들리지 않아 평화로운 찌 위엔
구름 한 송이 피어 있고
욕심 없이 뻗어간 줄 끝에
걸려 있는 산
걸려 있는 하늘……
posted by 청라

어촌


어촌

淸羅 嚴基昌
바다의 노래를 실러
배들이 떠나갔다.
마을은 텅 빈 공간 속에 누워 있다.
물비늘 번득이는 바다의 자유
동풍에 자유가 범람하고
아낙들의 빈 가슴이 까치집처럼 열려 있었다.
그대 돛대 끝이 휘저어 놓는 하늘
하얀 갈매기가 투시의 눈을 반짝이며
소리개처럼 돌아가는 날개 밑으로
마을은 이제 허청허청 일어나
두런두런 돌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계탑이 위잉위잉 울고 있었다.
배보다 먼저 돌아온 바다의 노래들이
뒤집히는 파도 위에서 하얀 몸체를 드러내고
마을의 한 끝을 치고 있었다.
아낙들의 가슴 속으로 춤추며 춤추며 스며들고 있었다.
posted by 청라

아침 序曲


아침 序曲

淸羅 嚴基昌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絃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posted by 청라

큰 스승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23. 11:46

큰 스승 (송시)
(박교식 선생님 정년퇴임식에서)

淸羅 嚴基昌

당신은
산바람에 씻기고 씻긴
소나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

한평생 올곧게
교단을 지키며
제자들의 마음도
곱게곱게 가꿔준 사람

산나리 꽃같이 숨어 피어
드러나지 않게
빛을 세워서
세상을 시나브로 밝혀가면서

어느덧 걸어온 당신의 발걸음은
제자들을 위한 눈물로
사십년을 넘겼습니다

질기디 질긴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당신은 참으로 큰 스승입니다.

posted by 청라

풀의 나라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4. 22:45

풀의 나라

淸羅 嚴基昌
풀이 일어나서
메마른 땅을 푸르게 덮는다.

뿌리끼리 서로 손을 맞잡아
땅 속의 모든 자양분을
빨아올리고

덩굴의 촉수를 감아 올려
나무도
꽃도
목을 조른다.

풀만 남은 풀의 나라엔
하늘 향한 발돋움이 없다.

풀잎끼리 팔 벌려
옆으로만 힘을 겨루며
한 뼘 더 뻗으려는
아우성만 있다.
posted by 청라

재회(再會)의 밤에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3. 17:11

재회(再會)의 밤에

淸羅 嚴基昌
보리암 앞 바다는
나를 보고
온 몸을 꿈틀거렸다.

수줍은 노을이
바다의 볼에
연지를 찍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르르 우르르
함성으로 달려들었다.

밤꽃 냄새가
온 바다를 덮었다.

초승달로 몸을 담그고
경련하는 바다의 몸속에 한 가닥씩
월광을 토해 내었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