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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여름날 오후
먹 오디 빛 호박잎 그늘
실잠자리 깊이 든 잠
빈 고샅 혼자 걷다
적막에 물릴 때 쯤
반쯤 연 사립 안에서
나직하게 암탉 소리
2018. 7. 5
글
계곡에서
물소리 그리다가
오수午睡에 잠긴 날에
풀 바람 꽃향기도
붓질 없이 숨결 틔워
도화지
맑은 여백엔
산이 풍덩 빠져 있다.
201`8. 5, 30
글
진짜 부부
송 교장이 오늘 따라 모임에 늦었다. 매 번 먼저 나와 기다리던 사람이 20분이나 늦게 나왔기에
“아니, 자네도 늙었나 보네. 이렇게 늦는 걸 보니”
하고 농을 건네니
“어머님 모시고 서울 병원에 다녀오느라 늦었네. 노인양반이 어찌나 끈질기던지.”
“무슨 소린가?”
“아버지 말이야. 평소엔 어머니를 잘도 구박하고, 싸우고 하던 양반이 의사선생이 괜찮다는데도 눈물을 글썽이며 별별 데 다 검사하라고 졸라서 늦었다네.”
송 교장 말을 듣다 보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따듯한 것이 차올랐다. 그래 부부란 저래야 되는 것이다. 평소엔 삶의 재미로 자글자글 싸우다가도 어려움에 처하면 몸이 부서져라 달려들어 도와주는 것. 나의 반쪽이 고통스러우면 나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그 것을 해소하려 온 힘을 다하는 것.
잔잔한 감동에 취하다 보니 또 다른 어떤 부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아프게 한다. K교장선생님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다. 늦게 상처를 한 후 자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여 년 연하의 여자와 재혼을 했다. 새 부인이 교장선생님께 정말 잘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속의 아쉬움을 달래며 행복하게 살기를 빌었다.
그런데 그 분이 몹쓸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두 번이나 수술을 하고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데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새 아내의 태도가 돌변해 교장선생님을 구박한다는 것이다. 내 후배가 찾아갔을 때도 교장선생님이 병원에 다녀왔다고
“아니, 늙은이가 빨리 형이나 따라갈 것이지 병원에는 왜 가? 쓸 데 없이 돈만 없 애고.”
하면서 구박을 했다는 것이다. 죽을 것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1%의 소망이라도 갖고 싶은 것이 사람이 아닐까? 그 여자가 만일 조강지처糟糠之妻였다면 애들의 아버지요 평생의 반려자의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내던지고 말았을까. 마음의 반을 접어 내 반쪽의 몸에 끼워놓고 아픔도 기쁨도 함께하는 것이 진짜 부부가 아닐까.
부부
나는 언제나
마음의 반을 접어서
아내의 마음 갈피에
끼워놓고 산다.
더듬이처럼 사랑의 촉수를 뻗어
심층 깊은 곳에 숨겨진
한숨의 솜털마저 탐지해 내고
아내의 겨울을 지운다.
어깨동무하고 걸어오면서
아내가 발 틀리면
내가 발을 맞추고
내가 넘어지면 아내가 일으켜주고
천둥 한 번 울지 않은
우리들의 서른다섯 해
사랑하고 살기만도 부족한 삶에
미워할 새가 어디 있으랴.
요즘 들어 아내가 자주 손이 저리다고 한다. 특히 잠을 잘 때 그 증상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아내가 신음 비슷한 소리를 하면 나는 잠결에도 자동적으로 아내의 팔을 주무른다. 목뼈에 협착증세가 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내의 손을 주물러주다 보니 옥처럼 곱기만 하던 손이 참 많이도 상하였다. 한복을 한다고 늘 바늘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주름살로 가득 앉은 손에 온통 바늘로 찔린 자국이다. 아내의 손끝은 성할 날이 없다. 손가락에 반창고가 흥부네 이불처럼 기워져 있다. 어느 날 그 손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제 그만 집에서 쉬라고 했더니 일을 갖는 것이 몸은 고되어도 마음이 행복하단다. 등을 두드려주다 어깨를 만져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짝 야위었다. 더듬이 한 끝 아내의 몸속에 남겨두고 관심을 쏟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2018.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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