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세상

환한 세상

 

 

아침에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위층 처녀가

안녕하세요.”

나도 기분이 좋아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수고하십니다.”

버스를 타는데 운전기사가

어서 오세요.”

점심을 먹고 나오며 식당 주인에게

맛있게 먹었습니다.”

작은 꽃잎이 모여 꽃밭이 되듯

반가운 인사가 모여

환한 세상이 된다.

 

 

2018. 4. 19

충청예술문화89(20198월호)

한글문학20(2020년 가을겨울호)

 

posted by 청라

봄날의 독백

 

 

비 그치자

봄꽃들이 한꺼번에 화르르 타올랐다.

계절이 서둘러 가는 산마루에서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결을 들여다본다.

우리들의 사랑은  옛날처럼

순차적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다.

매화가 질 때쯤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질 때쯤 철쭉꽃이 피고

지천으로 널려 폈다

일시에 지고 마는 꽃이 아니라

질릴 때쯤 새 꽃으로

연달아 피어나는 사랑이고 싶다.

 

 

2018. 4. 9

문학사랑127(2019년 봄호)

posted by 청라

<이달의 문제작>


잃어버린 자연을 찾아 배회하는 상상력

 

양병호

(시인 전북대 교수)

 

 

빈 들에

바람의 살 내음이 가득하다.

하루의 일 다 마치고 황혼을 바라보는

아버지 야윈 뒷모습 같은 허수아비.

나는 겨울 녘 들풀들의 신음마저

사랑한다.

박제로 남아있는 풀벌레소리들의

침묵도 사랑한다.

황금빛 가을에 이루어야 할 삶의 과제들

모두 마치고

부스러져야 할 땐 부스러지는

저 당당한 퇴임退任

눈부신 정적靜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먼 산사 범종소리 들을 채우면.

수만 개의 번뇌처럼 반짝이는 눈발

눈발 속으로 꺼지듯 지워지는 허수아비

  -엄기창, 겨울 허수아비전문

 

이 시는 겨울 들녘의 허수아비를 통해 노년의 인생을 서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허수아비는 노년에 이른 시적 화자의 마스크/아바타로 기능하고 있다. 시적 화자의 노년은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와 상상력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특히 소멸의 아름다움을 자연 사물과 풍경의 유려한 직조를 통해 감각적으로 구상화시키고 있다.

시인의 자연에 대한 인지는 바람의 살 내음이라는 감각은유를 통해 탁월한 표현효과를 성취한다. 여기서 바람은 화자의 살아온 생애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압축적으로 심화하고 있다. 나아가 무색무취의 바람살 내음이라는 구체적 감각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을 구상화하고 있다. 말하자면 빈 들에/ 바람의 살 내음이 가득하다는 화자의 열정적인 생애가 공허한 세계를 충만하게 변용하는 풍경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텅 빈 공허의 세계 속에서 허수아비에 주목한다. 그는 허수아비로부터 아버지를 환기한다. 물론 이러한 직관은 화자 자신에게로 전이되어 나아간다. 예컨대 시인의 상상력은 들판의 허수아비로부터 아버지로 또 다시 자아에게로 투영된다. 결국 화자는 노년에 이른 자신의 삶이 아버지의 살아온 생애와 겹치는 것임을 자각한다. 다시 말해 인생의 공통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 공통성은 야윈 뒷모습으로 표상된다. 다시 자신과 아버지 둘 사이의 인생의 공통분모는 허수아비로 수렴된다. “허수아비는 삶/인생에 대한 허무적 페이소스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말하자면 인생이란 허수아비의 이미지와 같이 공허하고 운명론적인 것임을 감각적으로 표출한다.

노년에 이른 화자는 이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서를 드러낸다. 그의 시선은 죽음의 계절에 당도한 들풀의 신음풀벌레 소리의 침묵에까지 확산되어 나간다. 화자는 이렇게 소멸이 예정되어 있는 자연 사물들이 자아의 존재론적 상황과 유사함을 이해한다. 화자는 궁극적으로 자연 사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사랑하는 자연 사물의 소멸의 운명은 결국 자신의 삶으로 치환된다. 화자는 자신의 존재론적 소멸의 상황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상징/죽음 앞에 당도한 자연 사물들은 삶의 과제들을 수행한 뒤 순연히 운명을 맞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당당한 퇴임으로 표상된다. 자연 사물들의 퇴임은 기실 화자의 존재론적 운명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존재론적 소멸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의연하고도 강직하다. 그러한 당당한 태도는 부스러져야 할 땐 부스러지는생로병사라는 자연의 이법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상징을 수긍하는 화자의 의연한 자세는 눈부신 정적의 순간에 삶의 번뇌를 해탈하는 범종소리와 조우한다.

이 시는 허수아비라는 사물을 통해 존재론적 고뇌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 존재론적 고민은 허무와 소멸의 관념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화자의 존재의소멸과 허무를 자연의 이법으로 당당하게수긍한다. 그리하여 존재론적 허무와 소멸에 대한 고뇌는 긍정적인 수용의 태도로 인하여 맑고 투명한 정서로 승화된다. 이 시의 이러한 관념과 정서는 다채롭고 선명한 자연 사물과 이미지를 통하여 구체성과 감각성을 훌륭하게 성취한다.

 

 

시문학20183월호 이달의 문제작 <>’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