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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 세상
어머니는
모두 다 미인이다.
자식 사랑 자식 걱정
별만큼 담은 가슴
곰보에
언청이라도
보고 나서 또 그립다.
2018. 3. 19
글
한국 명시조 감상
- 엄기창 편
석야 신웅순
1.
시조와 시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3장 6구 12소절 형식의 유무? 맞다. 그러나 그만으로 말할 수 없는 구석이 시조에게는 있다.
시조는 시조시가 아니라 그냥 시조이다. 그것이 다르다. 음악과 함께 있던 시조가 1920, 30년대부터 읽고 짓는 시조로 탈각, 지금은 원 의미와는 달리 자유시와 대가 되는 정형시의 한 형태로 굳어졌다.
시는 자유시라 사용 공간이 매우 넓다. 규격화된 시조와는 견줄 바가 못 된다. 애초에 음악이었던 시조창에서 시만 빼내 형식에 맞게 사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조를 시조시라고 하자’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맞다. 시조에 내재된 가락을 배제하고 나왔으니 시조는 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정형시일 수만 없는 것이 또한 시조의 숙명이기도 하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합니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는 시다워야하고 시조는 시조다워야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시조가 시가 되어가고 있는 작금에 적절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시조시를 시조로 회복시킬 때가 되었다. 사람들은 회복제가 언어의 음악성이라고 말들하고 있다. 자유 시인들이 시조를 쓰기 시작했다.
모 원로 비평가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유 시인들이 이제 철이 드는구먼”
흘려들을 수만 없는 가슴 치는 말이다. 일단 논의는 뒷담으로 미뤄둔다.
2.
어느 날 엄 시인께서 『봄날에 기다리다』라는 시조집을 부쳐왔다. 자유 시인이 웬 시조집을? 언젠가 같이 한 식사 자리에서 필자한테 ‘저도 시조를 씁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그냥 흘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조집을 보내왔다. 엄 시인이야 대전에서 시 잘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어 시조도 잘 쓸 것으로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 시인 시조를 알아야하고 사랑해야한다는 당위성, 그 하나만으로도 필자의 졸필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의 하이꾸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가. 얼마나 세계에 많이 알려져 있는가를 생각하면 시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참으로 낯 들기가 부끄럽다.
3.
차 마시다 창 너머로
봄빛 새론 산을 본다
표구하지 않아도
늘 거기 걸린 풍경
상큼한 녹차 맛처럼
가슴으로 다가온다
한사코 초록빛을
놓지 않는 산이기에
시드는 난을 위해
창 열고 산을 맞다
성긴 잎 사이에 꽃대
혼불 하나
켜든다
- 「경칩일기」전문
조지훈의 「파초우」를 읽는 듯하다. 봄빛이 새롭다. 멀리 있지 않은, 녹차 맛처럼 가슴으로 다가오는 산. 표구하지 않아도 늘 거기에 풍경이 걸려있는,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어느 선비의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이다.
선비는 난을 키우고 있다. 한번도 초록빛을 놓지 않는 산이기에 난을 위해 창을 열었다. 겨우내 동안거에 들었던 난 하나가 산을 맞으며 꽃대를 세워 혼불 하나 켜들었다. 난도 산에서 산빛을 빌려오고 물소리를 빌려와야 꽃대를 세우고 꽃을 피울 게 아닌가. 매화는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은 사람을 그윽하게 한다. 산과 마주한 어느 젊잖은 충청도 선비의 수묵화 한폭이다.
이렇게 엄시인은 시조 한 수를 시조집 첫장에 앉혀놓았다. 몇 장을 더 넘겼다.
시집 제목으로 쓴「봄날에 기다리다」에 눈이 멎었다. 박용래 시인의 「구절초」를 생각나게하는 시조이다. 돌아가신 누님을 위한 헌정 시조이다.
작은 누님,
오셔요.
버들피리 불게요
회재 높아 못 온다 해서
낮게 깎아 놓았어요.
산굽이
돌아 돌아서
아지랑이만 날리네요.
산그늘이
내려와서
장막처럼 드리우고
남가섭암 불빛이
별빛으로 일어서요.
밀양땅
산자락에 누운
누님 기다리는 봄 하루
-「봄날에 기다리다」전문
그렇다. ‘누님’은 ‘어머니’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겨운 말이다. 시인은 몇 년 전 누님의 부음을 듣고 대구까지 울면서 갔다. 밀양 땅에 묻고 돌아와서는 봄날 앵두꽃 필 때쯤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하염없이 누님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어머니, 누님만한 정 많은 이가 천지 어디에 있을까.
버들피리 불 테니 누님은 이 소리를 듣고 오라는 것이다. 회재가 높아 못 온다 해서 산도 낮게 깎아놓았다는 것이다. 누님의 첫제사에 누님이 좋아하던 고향의 솔바람소리, 뻐꾸기 울음소리를 선물로 가져와 누님의 무덤가에 심어 드렸다고 한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그 산굽이. 산자락에 누운, 정 많은 오지 않을 누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굽이굽이 정 많은 시인. 이도 잔잔하고 그윽한 산자락 같은 수묵화 파스텔톤 한 폭이다.
계룡산 산행 길에
단풍잎 하나 따서
아내의 화장대에
몰래 올려놓았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내 가을 편지이다.
얼핏 연 책갈피에
내게 보낸 연서 한 장
곱게 말린 단풍잎에
배어있는 따스한 정성
아내도 날 사랑한다는
홍조 어린 답신이다.
- 「가을편지」전문
시화가 괜히 생긴 것은 아니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어야 한다. 시인은 계룡산 갑사를 다녀오신 모양이다. 춘마곡, 추갑사라하지 않던가. 갑사만큼 아름다운 만추의 단풍은 없다.
계룡산 산행길에 단풍잎 하나 따서 아내 화장대에 올려 놓았다. 아내에게 쓴 가을편지이다. 시집이었나 싶다. 책갈피에 연서 한장 곱게 말린 아내의 따스한 정성, 단풍잎이 들어있다. 아내의 홍조 어린 답신이다. 단풍잎 하나가 사랑의 편지가 되고 사랑의 답신이 되는 평범한 것 같지만 비범한 신의 한 수이다.
책이 있으면 책을 읽어야 하고 술이 있으면 술을 마셔야한다. 재자가인이 있으면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해야한다. 아내가 있으니 지극히 사랑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잘 쓰는 사람은 이렇게 시를 쉽게 쓴다.
벽을 비워 놓았더니
산이 들어와 앉아 있다
꽃 향기
골물 소리
집안 가득 피어난다
채우고 채워진 세상
하나 비워 얻은 평화
- 「여백」전문
벽에 장롱을 비웠더니 산이 대신 들어와 앉았다. 산이 들어오니 꽃향기, 골물소리 집안 가득 피어나지 않는가. 세상이 채워진 기분이다. 하나를 비워 얻은 커다란 평화이다.
자연 합일, 안빈낙도의 경지랄까. 김장생의 시조가 생각난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어내니/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 두고/강산은 들일 데가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세상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가난하지만 가지지 못할 뿐이지 누릴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지금인들 못 누릴 게 무엇이 있는가. 이를 두고 누가 시조를 싸잡아 ‘음풍농월’이라고 말들을 하는가.
물에서 나는 소리가 네가지 있는데 폭포 떨어지는 소리,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 여울물 지는 소리, 붓도랑 흐르는 소리가 그것이고,바람이 내는 소리도 세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솔바람 소리, 가을 잎 지는 소리, 물결치는 소리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현대에 와 이런 여유의 참맛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아깝고 서러운 것이랴. 한낱 시를 치유거리로만 생각할 것인가.
4.
시조창은 뻗는 음이 있고 떠는 음이 있고 흔드는 음이 있다. 속청소리도 있고 막는 소리도 있고 푸는 음도 있다. 가곡창에는 처내는 음이 있고 굴리는 음이 있고 짚고 넘어가는 음도 있다. 밀어올리는 음도 있고 잇고 끊는 음이 있고 강하게 내는 음도 있다.
시조는 이런 음악성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시조는 시와는 판연 다르다. 언어만 같을 뿐 태생 자체가 다른 것이다. 시에도 음악성이 있는데 시조에 있어서 더더욱 말해 무엇하겠는가. 필자의 우문일지 모르나 최소한 그런 생각을 갖고 시조를 써야 맛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겨울 시인의 훈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휴머니티한 시조 한편이다.
눈 녹는 시장 골목
비둘기는
맨발이다
신발 전 털신 한 짝
사 신기고 싶구나
종종종
서둘러 가는
머리 위엔 하얀 눈발
-「비둘기- 시장풍경 5」첫수
엄기창 시인은 충남 공주 출신이다. 공주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5년 월간 시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2014년 퇴임, 정훈문학 대상 등을 수상한 바가 있다.
엄시인의 시조를 소개한 것은 시재 있는 많은 자유 시인들이 시조를 많이 사랑하고 많이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시조 쓰는 일이 새채비이기는 하나 조금만 익숙해지면 쓸 수 있는 것이 또한 시조이기도 하다. 시조는 우리 선인들이 수백년을 배앓이 하며 낳은 옥동자가 아닌가. 그 옥동자가 지금까지 700여년을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여기라도 좋다. 많은 이들이 쓰고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 시인들은 필히 시조를 쓸 지언저.
한국문협 이사장 문효치 시인도 필자에게 신작 시조집 『나도 바람꽃』을 보내왔다. 주옥같은 명편들이다. 뽑아 한 수 소개한다.
바람 속
파도 소리
못 말리는
몸살이다
누구를 사모하여
바다 끝에 기대섰나
뒷산이
우루루 몰려와
물속으로 뛰어 든다
-「우루루 - 수송나물」전문
-시조문학,2018.봄호,9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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