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뜰

 

 

화랑곡나방 한 마리

회백색 호기심 활짝 펴고 내 주위를 선회한다

시가 싹트는 내 서재는 벌레의 뜰이다

어디에서 월동했다 침입한 불청객일까

날갯짓 몇 번으로 시상詩想에 금이 마구 그어진다

홈·키파 살그머니 든다

그리고 놔두어도 열흘 남짓인 그의 생애를 겨냥한다

내 살의殺意가 뿜어 나오고 떨어진 그의 절망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버리면

깨어진 시가 반짝반짝 일어설까

창 넘어서 보문산이 다가온다

고촉사 목탁소리가 함께 온다

벌레야 벌레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나도 한 마리 나방

푸르게 날 세웠던 살생을 내려놓는다

벌레하고 동거하는 내 서재는 수미산이다

posted by 청라

물 위에 쓴 편지

시조/제3시조집 2022. 9. 1. 19:58

물 위에 쓴 편지

 

 

물오리 한숨 풀어

물 위에 편지를 쓴다

썼다 지운 이야기는

꽃잎으로 떠도는가

옛날은 희미해지고

향기만 가득 풍겨온다

posted by 청라

4월의 눈

4월의 눈

 

 

잠 안 오는 밤 접동새 불러

배나무 밭에 가면

4월에도 눈이 온다

보아라!

푸른 달빛 아래

다정한 속삭임의 빛깔로 내리는

저 아름다운 사랑의 춤사위

외로움 한 가닥씩 빗겨지며

비로소 지상에는 빛들의 잔치가 시작된다

배꽃이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손 흔들고 떠난 사람 얼굴마저 흐릿한데

사월 분분히 날리는 눈발 아래 서면

왜 홀로 슬픔을 풀어 춤사위로 녹이는가

접동새 울음은 익어

은하수는 삼경으로 기울어지고

돌아온다는 언약처럼

분분히 무유의 흙으로 떨어지는 꽃잎

돌아서서 눈물을 말리는 것은

다정도 때로는 병이 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