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睡蓮피는 아침

 

 

당신의 웃음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당신의 향기는

물속에서도 씻겨가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장 낮은 쪽에서

수줍은 미소로 피어

 

생우유 빛 살결과

밀어가 녹아있는 불타는 꽃술

 

! 당신은

한 번 빨려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저 늪 같은 사람.

 

 

2021. 1. 20

문학사랑136(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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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梵鐘 소리

시조/제3시조집 2021. 1. 17. 22:48

범종梵鐘 소리

 

 

사자후獅子吼

일갈一喝

사바娑婆를 깨워내어

 

말씀으로 쓸어내는

수천 겁 업연業緣의 짐

 

돈오頓悟

열리는 소리

저 법열法悅의 긴 울림

 

 

2021.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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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시조/제3시조집 2021. 1. 8. 17:47

자목련

 

 

허공 한 점에 초경初經이 비치더니

 

빛보다 소리보다

향기가 먼저 익어

 

선명한

진통의 빛깔

빅뱅으로 열린 우주

 

2021.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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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기원

카테고리 없음 2021. 1. 1. 09:53

새해의 기원

 

 

새해에는

웃을 일만 생기소서.

 

가족들 모두 모여 사는

올해 삶의 뜰에

부디 박수칠 일만 생기소서.

 

그리하여

당신에게도,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햇살처럼 눈부시게

행복할 일만 생기소서.

 

정축년 초하루

엄기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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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릿골 사랑

나릿골 사랑

 

 

아직 사랑하는 사람 만나지 못했으면

나릿골 감성마을

비탈진 언덕길 올라가 보아라.

골목이 끝나는 마지막 집에

요것조것 다 따지는 요즘 식 사랑 아니라

첫눈에 반하면 와락 안겨오는 옛날 식 사랑

한 사람 만날지 모르지.

러브레터로 떠오르는 달을 몰고 들어가

갈매기 목청을 빌려 진한 고백 한번 해 보아라.

해풍에 씻기고 씻긴 솔빛 사랑을

그 사람 가슴에 깊이깊이 심어놓아라.

촌스러워 더 정이 가는 알록달록한 지붕 아래

마지막 배가 들어오고

방파제 그늘 속으로 하루가 접히면

고단함도 때로는 낭만이 되기도 하지

소주 한 잔에 안주는 짭조름한 파돗소리

노래는 주인이 부르고

손님은 바다에 취하고

천 년을 해풍에 익은 해송의 춤 자락에 묻어

밤 내 사랑을 익히고 익히어라.

여명이 밝아오면 해당화로 피게

가슴을 들썩여 불을 지피거라.

실직국悉直國  사람들은 눈 감아도 알지.

순박한 눈빛에서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걸

새벽으로 해를 씻어 안고 내려오는

정다운 계단마다

햇살처럼 고이는 헌화가獻花歌 가락

 

 

2020. 12. 27

시문학598(2021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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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피던 날

 

 

찔레싱아 꺾어 먹다

소쩍새 소리에 더 허기져서

삶은 보리쌀 소쿠리로 달려가

반 수저씩 맛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밥보자기 치워놓고

정신없이 퍼먹다 보니

밥 소쿠리 텅 비었네.

서녘 산 그림자 성큼성큼 내려올 때

일 나갔던 아버지 무서워

덤불 뒤에 숨어 보던

창백한 낮달 같은 얼굴 

하얀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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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의 숨결

시조/제3시조집 2020. 12. 19. 09:11

계룡의 숨결

 

 

누구를 사랑하기에 저 간절한 몸짓인가

이 골 저 골 물소리로 가냘픈 것들 보듬어 안아

백설이 분분한 시절에도 초록 띠를 둘렀다.

 

저녁이면 목탁소리 산 아래 마을 씻어주네.

솔향기 꽃빛 노을 봉송奉送처럼 싸서 보내

충청도 처맛가마다 깃발처럼 걸린 평화

 

산봉마다 둥글둥글 원만한 저 모습이

삼남을 아우르는 충청도 사랑이라

계룡의 저 높은 숨결 충청인의 기상이라.

 

 

2020. 12. 19

시조사랑20(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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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라는 이름

 

 

세상에 제일 아름다운 이름은

어머니다.

 

쪽진 머리

아주까리기름 발라서 곱게 빗고

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리가 백목련 같던

어머니다.

 

찔레꽃 필 무렵 보릿고개에

식구들 모두 점심을 굶을 때에도

책보를 펼쳐보면 보리누룽지

몰래 숨겨 싸주신

어머니다.

 

자식의 앞길을 빌어준다고

찬 서리 내리는 가을 달밤에

장독대 앞에서 손 모아 빌고 있다가

하루 종일 콜록대던

어머니다.

 

타향에서 서러운 일을 당할 때마다

고향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을 때마다

된장찌개 냄새처럼 제일 먼저 떠오르던

 

어머니, 어머니

부를수록 그리워지는

세상에서 제일 향기로운 이름이 바로

어머니다.

 

 

202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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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보았네

수필/서정 수필 2020. 11. 20. 10:13

내려갈 때 보았네

 

  가장교에서 유등천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능소화 덩굴이 흐드러지게 늘어져 있다. 7월 하순부터 꽃봉오리들이 조롱조롱 맺히기 시작해서 어느 날 아침 무심코 바라보면 이 줄기 저 줄기에서 적황색 화려한 꽃등들이 피어난다. 아내와 함께 유등천변 산책길로 내려가다가 나는 문득 그 불쑥불쑥 솟아나는 꽃들이 아내가 내뱉는 볼멘소리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아온 지 어느덧 40여 년, 아내라고 어찌 불평이 없었겠는가.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학교에만 매달리는 남편 때문에 혼자 그 억센 아들 둘을 키우다시피 한 아내. 그런 속에서도 아내는 한 마디 불평조차 없이 긴 세월 인종의 자세로 견디어 왔다.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화려한 능소화의 몸짓 뒤편에 숨은 멍든 꽃잎, 벌레 먹은 꽃잎, 시든 꽃잎들이 마치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고 숨겨온 아내의 아픔처럼 눈에 들어왔다. 저런 아픔들을 끌어안고 아내는 그 오랜 시간을 견디어온 것이었다. 나는 시조 한 수가 선명한 그림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 다물고

  참다 참다

  터져버린 볼멘소리

 

  귀담아

  듣다 보면

  송이송이 진한 아픔

 

  아내여, 긴 세월 견딘

  인종忍從 벗어 버렸구나.

                               엄기창, ‘능소화전문

 

  치매를 앓기 시작한 후 아내는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참지 않고 쫑알쫑알 불평을 잘도 말한다. 가슴에 콕콕 와 닿는 그 말들이 송알송알 피어나는 능소화 꽃송이 같다. 치매로 인해 원래 지니고 있던 신념이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늙어가면서 그동안의 삶에 억울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단하던 인종의 자세가 깨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오히려 아내의 그런 태도가 반갑다. 이제는 아내나 나나 길다면 긴 인생길에서 내려오는 길로 한참은 내려왔다. 황혼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하는 길을 걷고 있는데 서로를 인식해 할 말도 못하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선생님의 그 꽃이라는 시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올라가는 길에는 왜 그 소중했던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결혼 다음해 겨울 첫 아이를 낳고 돌처럼 차가웠던 셋집 단칸방에서 아이만은 따뜻한 곳에 누이려고 몸살 앓던 아내의 아픔. 보리밥이 먹고 싶다고 조르는데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안 가고 뻗대다가 아내를 울리고 말았던 철없는 세월. 그 젊은 날에는 왜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도 아픈 것들도 보지 못하고 있다. 봄꽃들의 다정한 속삭임도, 새들의 노랫소리도, 여름날의 무성한 녹음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가을날이 되어서야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는 단풍의 현란한 몸짓에 멈춰 서서 한참을 감탄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유등천 산책길을 걸으며 아내와 손을 꼭 잡고 걷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옛날에는 아내가 잡는 손을 창피하다고 뿌리쳤었는데 요즈음은 오히려 내가 아내의 손을 틀어잡는다. 그리고 벤치에 함께 앉아 올라가는 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두루미며 청둥오리며 물총새들의 삶을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 이제야 나는 웃음 뒤에 숨은 아내의 아픔도 슬픔도 말갛게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모양이다.

  아내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꽃 이름을 몇 번을 가르쳐 주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에도 가르쳐준 꽃 이름을 또 다시 물어본다. 나는 내려가는 길에서야 이제 철이 들어서 열 번을 물어도 활짝 웃으면서 가르쳐준다.

  “여보, 이거 무슨 꽃?”

  “금계국

  “, 금계국

  환하게 웃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천 번을 물어봐도 짜증내지 않고 기꺼이 가르쳐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는 요즈음 돌부처나 십자가가 가리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두 손을 맞잡으며 나직하게 읊조린다.

  “딱 지금만큼으로 30년만 가게 해 주세요

 

 

posted by 청라

삼척에 가면

삼척에 가면

 

 

바다의 탁본拓本을 뜨러

삼척엘 갔네.

그믐밤의 어둠을 짙게 칠했다가

초하루 아침의 맑은 햇살로 벗겨내면

파도의 싱싱한 근육들과 갈매기 소리,

삼척 사람들 다정한 미소가

해국海菊으로 피어있네.

태백을 넘어올 때 서둘러

손 흔들던 가을이

죽서루와 어깨동무로

빨갛게 타고 있는 곳

찍혀 나온 바다엔

좋아하면 모두 다 주는

삼척 사나이의 막걸리 맛 웃음소리가

산호초 사이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네.

 

2020. 10. 27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