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빛깔의 말

 

 

무슨 꽃이냐고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묻지만

 

환하게 웃으면서

장미꽃이라 대답합니다.

 

백 번 천 번을 물어도

지워진 백지에

다시 도장이 찍힐 때까지

 

장미 빛깔의 말로

대답할래요.

 

“사랑”이라고

 

 

2020. 5. 30

시문학202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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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아빠

동시 2020. 5. 27. 09:18

지렁이 아빠

 

 

날씨 좋은 날

지렁이가 길로 나왔어요.

 

개미 몇 마리 물어뜯을 때마다

옴찔거리는 지렁이

 

손으로 집기는 징그럽고

묵은 갈대를 꺾어 젓가락질 합니다.

 

몸부림치는 지렁이를

풀숲 땅에 묻어주고는

해님처럼 환하게 웃어줍니다.

 

오늘 태균이는

지렁이 아빠

 

 

2020. 5. 27

한밭아동문학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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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아침

동시 2020. 5. 23. 10:20

사월 아침

 

 

명자 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절뚝거리며

한사코 도망가는 비둘기와

 

붕대를 들고

쫓아가는 소녀 하나

 

비둘기는 알 리가 없지요.

걱정스러운 소녀의 마음을

 

쫓기다 쫓기다

포르르 날아가는 비둘기 뒤로

 

소녀 울음만

명자 꽃처럼 빨갛게 익었습니다.

 

 

2020. 5. 23

한밭아동문학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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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상징

엄기창론 2020. 5. 23. 09:58

이달의 문제작

 

 

          다시, 상징

 

                                  김지숙시인문학평론가

 

 

 

나이는 마음이다.

 

스물이라 생각하면 가슴에서

풀잎의 휘파람 소리가 나다가도

일흔이라 생각하면

은행잎 노란 가을이 내려앉는다.

 

일흔이라도

스물처럼 살자.

언제나 봄의 빛깔로 살아가자.

                     -엄기창, 나이의 빛깔전문

 

  휠라이트는 언어의 긴장감의 정도에 따라 상징을 협의의 상징과 장력상징으로 나눈다. 협의로서의 상징은 관습적 상징을 또 다른 말로 칭한 것으로 사회나 조직 내에서 부르는 의미가 한정된 상징을 말한다면, 장력상징은 필연적으로 의미가 만들어지므로 다소 애매한 점을 특징으로 든다. 이는 개인에 의해 탄생되므로 반드시 개인의 내적 특징이 가미되어 의미가 조직되는 점이 필수 요소로 작용하는데 여기에는 개인만의 깊은 상상력과 연상이 관련된다.

  상징은 어떤 내적 상상력에 힘입어 이미지가 창작되는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필요하며 이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지만 이들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것이 어떤 실체로 드러나는 지의 모습을 찾는 것으로 완성도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은 개인이 시에서 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하므로 언제나 새롭게 탄생되며 그 대상은 늘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특징을 띤다. 물론 시인이 의도한 관념이나 비가시적인 이념을 암시하기도 하고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이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에 비가시적인 내용은 드러나지 않고 이를 암시하는 구체적인 상징만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공자는 은행나무 아래 단을 만들어 제자를 가르쳤기에 공장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을 행단이라 하고 후에 은행나무는 교육과 청렴의 상징으로 상징되었으며, 15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살아왔으며 빙하기에도 살아남은 살아 있는 화석이라 칭하는 것도 은행나무가 지닌 상징성에 기인된다. 김수영의 ’()은 인간을 상징하며 박성룡의 ’(풀잎)은 선한 자연의 힘을 표상한다.

  엄기창의 시 나이의 빛깔에서 은행나무과 대조를 이루는 사물로 표상된다. 화자는 사람의 나이를 젊고 힘 있을 때의 사물은 , 푸릇한 휘파람소리를 내는 풀잎으로 표상되고 나이든 때의 모습은 가을이 내려앉은 노란 은행나무에 견준다. 시에 나타나는 젊음의 힘’ ‘유연성’ ‘승리등을 상징하며, ‘은행잎’(나이의 빛깔)은 퇴락의 의미를 지닌다. 노란색은 시각적 특성으로 보면 두 분류로 나뉜다. 그것은 명랑’ ‘힘참’ ‘전진’ ‘행운등을 의미한다. 또한 황금색으로 보면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 ‘부귀영화’ ‘역동성’ ‘즐거움’ ‘생동감등을 뜻한다. 반면 차갑고 퇴락하는 의미와 연상되는 참회자로서의 성직자를 상징하는 색의 의미를 지닌다. 시에서 은행나무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푸릇한 의 나이로 살아가고픈 화자의 심정을 감안할 때에 후자의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한다.

 

                                                                                               『시문학582(202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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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말

물의 말

 

 

마음을 다 굽히고 낮은 곳만 향하더니

하구에서 다시 보니 산 하늘 다 품었네.

한사코 몸으로 보인 물의 말을 알겠네.

 

 

202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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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얼굴

권력의 얼굴

 

 

정의를 앞세울수록 정의로운 사람 없다.

겉모습은 화려한데 뒤는 저리 더러울까.

권력은 속옷과 같아 오래될수록 오물 범벅

 

 

2020. 5. 22

posted by 청라

둑길에서

둑길에서

 

 

반듯하게 걷지 않아도 좋다.

 

삶의 굽이만큼

구부러진 꼬부랑길

 

민들레꽃이 피었으면

한참을 쪼그려 앉아

함께 이야기하다 가도 좋고

 

풀벌레 노랫소리 들리면

나무로 서서 듣고 있다가

나비처럼 팔랑거려도 좋다.

 

달리지 않아도

재촉하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둑길에 모여 있다.

 

2020. 5. 21

posted by 청라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시/제7시집 2020. 5. 17. 10:09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지난 생일에 내가 사준

진주 반지의 영롱한 빛깔도 흐려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여섯 살 손자의 이름도 낯설어지고

가끔은 정말로 잊고 싶지 않아서

자다 말고 문득 일어나 내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내의 저 간절한 주문呪文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시문학2020년 8월호

 

posted by 청라

정비 사업

정비 사업

 

 

고향 마을 하천 공사에

포크레인은 사정이 없다.

새집들도 풀꽃들도

추억마저 퍼 담는다.

부르르 요동칠 때마다

깨어지는 내 어린 날

 

아내도 이른 나이에

정비 사업 시작했나.

기억들 하나하나

망각으로 깎여 나가

아내의 수첩 속에서

지워지면 어쩌나.

posted by 청라

사모가

사모가

 

 

꽃이 진 자리 옆에

다른 꽃이 피어나서

 

자연의 순환은

멈춤이 없건마는

 

어머니

가신 후에는

기별조차 없는가.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