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

향 맑은 옥돌 같은 당신을 보내며

            -오명성 교장선생님 정년퇴임을 축하하며

 

당신 곁에 서 있으면

산골짜기 굽이쳐 돌아 폭풍처럼 달려가는

힘 센 산골 물소리 들려옵니다.

아이들 위해 가야 할 길을 갈 때에는

험한 산봉우리 완강한 바위도 뛰어넘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당신은

의지가 강한 산골 물입니다.

 

당신 곁에 서 있으면

평야를 유유히 흘러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가슴 넓은 강물소리 들려옵니다.

같이 걷는 사람들과 손잡고 갈 때에는

눈보라 칼바람에도 어깨동무를 풀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품어 안고 함께 가는

당신은

포용력이 강한 강물입니다.

 

한평생 달려온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보면

민족의 어두운 새벽에 촛불을 들고

한 올 씩 꺼져가는 불빛을 키워

당신의 걸음 따라 아침이 오고

힘없던 조국은

세계를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당신의 흐름은 이제

바다에 닿았습니다.

당신이 담아온 풀 향기와 도시를 흐르며 거느린

수많은 이야기들도

이제는 닻을 내렸습니다.

향 맑은 옥돌 같은 당신을 보내며

아쉽게 손을 흔들며

우리도 당신을 닮은 향내 품은 물로 살겠습니다.

 

posted by 청라

민들레 편지

시/제3시집-춤바위 2013. 4. 30. 08:44

민들레 편지

 

현충원에 가서 잡초를 뽑다가

어느 병사의 무덤에서

날아오르는 민들레 홀씨를 보았다. 

바람도 없는데

무덤 속 간절한 절규가 솟아올라

북녘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따뜻한 사랑 한 포기

싹 틔울 수 없는 툰드라의 언 땅에서

흰옷 입은 사람들의 소망이 싹틀 수 있도록 

반백 년 넘게 땅 속 깊이 묻어

발효시킨

저 병사의 피 맺힌 염원과  

‘함경도’

소리만 들어도 눈물 흘리시던

내 할아버지의 슬픔,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에

담아 보낸다.

내년 민들레꽃 피기 전까지 

굳게 동여맨 민족의

허리띠를 풀자.

 

2013. 4. 30

posted by 청라

외돌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3. 24. 08:36

외돌개

               -제주 詩抄2

 

누군가 환청처럼 부르는

소리를 따라

서귀포 칠십 리 해안선 길을 걷다가

 

기다림으로

하반신이 닳아버린

외돌개, 그 처절한 외로움을 만나다.

 

삶이 때로는

슬픈 무늬로 아롱질 때도 있지만

동터오는 아침 햇살로 반짝 갤 때도 있으련만

 

외돌개야!

빠지다 만 몇 올 머리카락 신열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주름진 피부 골골마다

소금기로 엉겨 녹지 않는

진한 통증을 안고

 

먼 바다를 응시하는 눈망울엔

아직도 무지개처럼 영롱한

꿈이 어렸다.

 

외로움을 보석처럼 깎고 다듬어

메마른 가슴에

해당화 한 송이 피울 날을 기다리며

 

갈매기 소리에도 귀를 막고

혼신의 힘을 다해 파도 소리로 부서지는

할머니 옆에

 

나도, 문득

자리를 펴고

하나의 돌이 되고 싶었다.

 

2013. 3. 24

 

 

 

 

posted by 청라

일출봉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3. 23. 08:15

일출봉에서

           - 제주 詩抄1

 

가슴에 담아 가면 됐지

사진은 찍어 무엇 하나

 

성산포는 느긋하게

누워있고

일출봉은 할 말을 참고 있다.

 

파도 소리는 무슨 색깔일까

술에 취하여 바다를 보면

속앓이로 끊임없이 뒤척이는

바다의 마음이 투명하게 보인다.

 

아이들 따라

일출봉에 왔다가

나는 바다와 속이 틔어 친구가 되었다.

 

2013. 3. 23

 

 

posted by 청라

불꽃같은 삶

               -정문경 시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모란꽃 부스스 피어나는

오월인가요,

꿈결인 듯 그대 訃音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따라가는 뻐꾸기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칠갑산 넘어가더니

갑자기 허허로운

빈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대 있는 세상에서도

아이들 울음소린 들리는가요? 

방실방실 웃는 아이 모습 어이 놓고서

그리 서둘러 이승 떠났는가요?

 

그대 신다 버린 낮달이 한 짝

서편 하늘가에

서럽게 떠 있습니다.

 

그대 비운 빈자리에

오늘도 흐드러지게 꽃은 피고

세상은 어제처럼 무심히 돌아가지만

 

짧아서 더욱 화려하게 타올랐던

삶의 불꽃

우리 마음 갈피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겁니다.

 

 

posted by 청라

가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3. 3. 21:30

가시

 

숨기다가 숨기다가

무심코 튀어나온

아내의 볼멘소리처럼

 

수줍게 고갤 내민 탱자나무 새순에

저 부드럽고 뾰족한

가시

하나

 

2012. 3. 3

posted by 청라

부부

시/제3시집-춤바위 2013. 2. 19. 21:58

부부

 

나는 언제나

마음의 반을 접어서

아내의 마음 갈피에

끼워놓고 산다.

 

더듬이처럼 사랑의 촉수를 뻗어

심층 깊은 곳에 숨겨진

한숨의 솜털마저 탐지해 내고

아내의 겨울을 지운다.

 

어깨동무하고 걸어오면서

아내가 발 틀리면

내가 발을 맞추고

내가 넘어지면 아내가 일으켜주고

 

천둥 한 번 울지 않은

우리들의 서른다섯 해

사랑하고 살기만도 부족한 삶에

미워할 새가 어디 있으랴.

 

2013. 2. 19

 

 

posted by 청라

滿虛齋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2. 12. 29. 09:49

滿虛齋에서

 

옷깃에 묻어 온 속세의

근심 몇 올이

아침 햇살에 안개처럼 풀리고 

힘들여 벗지 않아도

때처럼 벗겨진 慾心 말갛게 씻겨

풀꽃으로 피어나는 滿虛齋에서 보면 

저기 보이지 않는

虛空

무슨 울타리라도 있는 것일까! 

마을에서 산 따라 조금 들어왔을 뿐인데

모든 소리들이 걸러지고 닦여져서

딴 세상 같은 고요……. 

秀澗橋를 건너다

문득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무성산은

산의 커다란 마음을 조금씩 녹여

滿虛瀑으로 흘려보내서 

천둥 같은 소리로 노래할 때나

가는 한숨으로

잦아들 때나 

인생의

차고 비움도 滿虛齋에 서면

폭포 소리에 녹아

물안개로 떠돌아라.

 

2012. 12. 29

 

滿虛齋(만허재)-충남 공주시 사곡면 회학리에 있는 엄기환 화백 화실

 

 

posted by 청라

따뜻한 가을

시/제3시집-춤바위 2012. 11. 6. 14:03

따뜻한 가을

 

 

아파트 안 도로를 차로 달리다가

다리 다친 비둘기 가족을 만나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선다.

 

경적을 울리면

아기 비둘기 놀랄까봐…….

 

산을 오르다가

허리 구부러져 누운 들국화를 보면

발을 멈추고 튼튼한 이웃에 기대어 준다.

 

가벼운 바람에도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잠시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내 따스한 마음 머물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조그마한 나의 온기가

다리가 되고, 날개가 되고

숨결이 되어줄 사람 얼마나 많은가.

 

단풍잎 붉은 기운이

핏줄을 타고 들어온다.

바람은 차도 가을은 따뜻하다.

 

2012, 10, 6

posted by 청라

소나기 마을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2. 10. 28. 01:53

소나기 마을에서

                              엄 기 창

 

가을 햇살이 눈부시어

산새 소리 몇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목넘이고개 올라가 보면

 

아련한 사랑 이야기

노란 마타리 꽃잎으로 피어난

거기 소나기 마을 그림처럼 있네.

 

눈 씻고 찾아봐도

소녀는 없고

 

순원의 유택 앞에 가만히 서니

인생이여!

삶은 무지개 빛 향기 같은 것,

 

수숫대 엮어 만든 초막 속에

쪼그려 앉아

하루에도 몇 번씩 소나기로 씻어낸

 

맑아서 눈물 나는

사랑으로 살고 싶어라.

 

2012. 10. 27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