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계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0. 11. 4. 08:10

원가계에서

 

신선도를 보고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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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3

시/제3시집-춤바위 2010. 4. 7. 10:10

독도3

 

 눈을 뜨고 잔다.

 

파도에 갈리어

반달만큼 남았어도

 

대양을 막아선

저 완강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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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오는 날

시/제3시집-춤바위 2010. 3. 31. 11:04

봄비 오는 날

 

           엄 기 창

 

 

봄비 오는 날

빗소리에

한 사람 목 맨 부음이 묻어오고

 

매화꽃은 한

봉오리씩

겨울 떨치고 피어나는데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3월의 눈발들이 핏기 잃은 가지마다

날선 눈꽃으로

숨을 막아도

 

멍든 아픔 삭혀

꽃등 환하게 일어서는 매화

 

아프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posted by 청라

취설吹雪

시/제3시집-춤바위 2010. 1. 21. 11:45

취설吹雪


  마을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섬처럼 조그만 집 하나 있습니다.  비어있는 도화지처럼 온 세상은 눈 덮여 하얗고, 길 끊어진 이웃은 십리보다 멉니다. 눈보라가 파도처럼 넘실거립니다. 울타리가 지워지고, 사립문이 지워지고, 위태롭게 서 있던 작은 집도  붓질 한 번에 지워집니다. 온 세상이 지워진 도화지 위에 등대인가요, 장밋빛 불빛 비친 창문만 화안합니다.


  세월이 머리위에 눈빛으로 앉은 할머니는 저녁 상 위에 모주 한 병을 올려놉니다. 참나무 울타리로 으르렁 으르렁 눈보라가 지나가는데, 상관없지요. 할머니, 할아버지 부딪치는 잔에는 흥이 익어 얼굴은 먹오디 빛입니다. 할아버지는 추억의 갈피 속에서 가장 정다운 콧노래 뽑아내어 흥얼거리고, 할머니의 몸은 조금씩 흔들립니다. 타지로 나간 자식들 목소리 기다리다 수화기 위엔 뿌옇게 먼지가 쌓였지만, 신명이 물오른 할아버지 눈가엔 섬처럼 외로운 외딴집 겨울밤도 할머니 하나 있어 향연饗宴입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길마다 가려주는 취설吹雪도 포근한 수막繡幕입니다.        


2010.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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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까치

시/제3시집-춤바위 2009. 10. 23. 09:16

아파트 까치

 

늦은 아침

아이들 놀이터 벚나무 위에서

까치가 요란스레 울고 있다.

 

아파트 문은 모두 닫혀있고

유치원도 못 갈 어린애 혼자 듣다가

모래만 뿌리고 심심해서 돌아갔다.

 

맑은 아침 햇살 물고 와

자랑스럽게 울고 있는 까치야

우리 마을엔 네 울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 아무도 없다.

 

생활에 쫓기는 도회지 사람들에겐

반가운 사람이란 아예 없는데

반가운 손님 온다고 아무리 울어봐라.

 

한나절 소식 전하다 지쳐

비둘기들 사이에 섞여 모이나 주워 먹다

자동차 경적에 놀라 비명처럼 쫓겨가는

 

비둘기의 날개 너머로

너무도 눈시린 가을…….

 

2009. 10. 23

 

 

 

posted by 청라

3m

시/제3시집-춤바위 2009. 10. 6. 08:37

3m

 

당신들의 그 새벽엔

하나님도 조상들도 아무도 없었다.

새벽 산책길, 3m 간격

그것이 삶과 죽음의 거리였다.

 

길 건너 도솔산이

부르는 대로

아내는 웃으며 도로로 들어서고

하늘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15m를 날아

아스팔트 바닥에 산산이 부서졌다.

 

너무도 맑아 바라보기도 아깝던

한 송이 짓이겨진 코스모스 꽃이여

피 묻은 향기는 하늘하늘 날아

먼 길을 가고

 

남은 사람의 앞길에

가로놓인

저 막막한 사막

 

새벽 산책길, 3m 간격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였다.

 

2009. 10. 6

 

 

posted by 청라

산이 되기 위해

시/제3시집-춤바위 2009. 9. 25. 22:07

산이 되기 위해

 

관음봉

꼭대기에 올랐다.

사랑, 미움 구름으로 날린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재어보던 그만큼

하늘은 더 높아졌지만

 

산 위에 다섯 자 반쯤

키를 보탰으면

입 다물고 산이 되어야지.

 

이름표를 떼고

장송 옆에 서서

내 마음 아궁이에 초록 불을 지핀다.


2009. 9. 25 

 

 

posted by 청라

생가 터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9. 8. 30. 12:29
 

생가 터에서



안부가 궁금해서

안테나처럼

회초리 하나 쫑긋하게 내세운 밤나무


가지 끝에는

썩은 둥치의 부피만큼 머물렀던

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

밤 잎으로 피어


그늘 속에

아버님 기침 소리

재주 있는 자식들 대처로 학교 못 보내

밤 내 콜록거리던 아버님의 각혈


육이오사변 통에 약 한 첩 못 써보고

자식 둘 먼저 보낸 

피멍 얼룽이는 어머님 눈물

한숨 얽어 베 짜는 소리


연실이만 보면

가슴 설레던

무지개 추억들은 다 지워지고


웃자란 콩 포기 아래 묻히다 남은

주춧돌에 걸터앉으면

한여름이 달궈놓은 알큰한 온기처럼

 오늘을 씻어주는

그믐 빛 따스한 추억  





2009. 8. 30


posted by 청라

소래포구

시/제3시집-춤바위 2009. 8. 12. 11:40

 

소래포구


        

물 빠진 진흙 뻘엔

뿌리까지 다 드러낸 작은 목선들이

오후의 햇살 아래 낮잠을 자고


포구를 가로질러

있는 듯 없는 듯

실처럼 가느다란 철교가 하나.


소금기 머금은 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오이도 가는 길을 걸으면


술 한 잔에 담아 마시는

소래포구 옛이야기 한 조각으로

가을처럼 발갛게 취할 것 같다.


아침이면 젓갈 팔러

수인선 타고 떠나던 사람들아

어물전 넘어 선술집에

눈물 젖은 푸념만 가득 남았구나.


댕구산 노루목 장도포대엔

바다를 향해 절규처럼

노을이 날린다.


2009. 8. 12

소래포구: 인천시 논현동에 있는 항구

posted by 청라

망초꽃

시/제3시집-춤바위 2009. 7. 6. 18:53

 

망초 꽃


망초 꽃도

모여서 피니

온 밭둑이 화안하데…….


가느다란 대궁들이 하나씩

서로의 아픔을 채워

혼자 있을 때 드러나지 않던

작은 꽃빛들을 싹틔우고,

등 기댄 채 어느 달 없는 밤

한 목소리로 날 세워 개화함이여!


망초 꽃도

모여서 피니

온 세상이 화안하데.

 

2009. 7, 6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