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麻谷寺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2. 3. 3. 10:24

麻谷寺에서

 

저녁 범종梵鐘소리가

사바세계로 건너갑니다.

종신鐘身을 들어 올린 용뉴龍紐

용음龍音으로 일어서서

오층석탑 가슴 언저리를

한 바퀴 돌고

잠든 풍경風磬소릴 깨워 어깨동무를 합니다.

대광보전으로 날아들어

부처님 입가에 떠도는

미소를 조금 퍼 담아

칠채 빛 소리로 극락교를 건넙니다.

천왕문을 지나

해탈문을 나설 때

저녁 예불 범창梵唱소리 따라 나섭니다.

모든 소리들이 숨을 죽입니다.

이제 저 부처님의 손길이

태화산 솔바람에 기척을 숨기고

지친 사람들의 처마 밑으로 스며들겠지요.

마음속에 칼을 품은 사람은

칼을 내려놓고,

삼화三火에 떠는 사람들도

번뇌를 내려놓을 것입니다.

욕계欲界의 황혼이 정결한 어둠에 가라앉고

다시 어둠을 쓸어내듯

맑게 씻긴 하늘에 연등처럼 초승달이 떠오릅니다.

청명淸明의 숨결이 연둣빛 생명으로 어리는

벚나무 곁에

나는 조그만 돌부처로 서 있습니다.

범종소리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은

반쯤 깨어져도 천 년을 지워지지 않는

돌부처의 미소를 연꽃처럼 피운 그대로…….

 

201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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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미소

시/제3시집-춤바위 2012. 2. 20. 05:34

부처님 미소

 

 

조금씩 조금씩 번지다가

온 얼굴

가득한 자비慈悲

 

닮을 수가 없다.

 

마곡사 범종소리로

욕심을 씻고

탑을 돌면서 마음을 비워 봐도.

 

이순耳順을 지나면서

내 마음의 갈대밭에 연꽃을 피워보려는

평생의 꿈을 버렸다.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다가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조금씩 조금씩 번지다가

온 얼굴

가득한 평화平和.

 

 

201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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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산

시/제3시집-춤바위 2012. 1. 29. 21:06

붉은 산

 

된서리 쏟아진 아침

시루봉 정상頂上

몇 잎 붉은 물 번지더니

 

무심히 방관傍觀하는 사이

온 산이 불타듯

단풍으로 점령占領되어 버렸다.

 

초록의 살밑에 초록인 듯

초록인 듯

한여름 숨어 살다가

 

때로는 초록보다 더 진한

진초록으로 위장僞裝하고 있다가

 

칼바람 하나 입에 물고

순식간에 온 산을 지배支配하는

빛의 반란反亂!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

단풍에 취해 넋을 잃고 살다 보면

겨울이 온다는 것을,

 

혹독酷毒한 눈보라가

온 산을 뒤덮는다는 것을.


2012. 1. 28

 

 

 

posted by 청라

마티고개

시/제3시집-춤바위 2011. 11. 10. 09:36

마티고개

 

 

속이 뻥 뚤려

시원하지?

 

물으면

 

버려진 길 더 야윈 고갯마루

목 길-어진

느티나무 꼭대기에 

 

한사코 매달린 늦가을

기다림 하나……
.

 

 

2011. 11. 10

 

 

posted by 청라

교사의 푸념

시/제3시집-춤바위 2011. 9. 2. 14:50

교사의 푸념 

 

아침에 교문을 들어설 때에

“안녕하세요?”

인사 한 마디에 꽃등처럼 환해지는

하루의 예감

 

아이들 웃음을 마시며 사는

나의 예순은

아버지의 예순보다 이십 년은 아름답다.

 

어느 화단에 가면

우리 아이들보다

더 빛나는 꽃이 있으랴.

 

“이놈들!”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며 위엄을 부려 봐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에

결국은 허물어지는 내 안의 성城

 

울타리 밖에 빙벽을 철판처럼 세우고도

가슴 속엔 불꽃을 심어 키우며

“선생님, 아파요.”

얼굴만 찡그려도 가슴이 덜컥하는

나는 천생 선생인가보다.

 

2011. 9. 2

 

posted by 청라

변신變身

시/제3시집-춤바위 2011. 5. 22. 09:16

변신變身

 

바람에는 빛깔이 없다.

 

빛깔이 없어

더욱 화려한 바람

 

오월, 상수리나무

목청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서는

물안개처럼 몽롱한 연둣빛 속살이

언뜻언뜻 보인다.

 

단풍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산기슭 올라가는 바람의 꽁지에서는

빛살의 창을 모두 거두고 서해로 투신하는

태양의 열정이 타오르고

 

겨울!

눈보라 몰고 가는 바람의 날개에서는

죽음보다 더 깊은 침묵의

하얀 정적,

 

빛깔이 없어

더욱 화려한 바람

 

바람에는 바람에는

빛깔이 없다.

 

2011. 5. 22

posted by 청라

빈 마을 2

시/제3시집-춤바위 2011. 5. 15. 11:31

빈 마을

2


 

장다리골엔 봄이 왔어도

장다리꽃이 피지 않는다.

 

아이들 웃음소리 묻어나던

공회당 깃대 끝엔

찢어진 깃발처럼 구름 한 조각 걸려있고,

 

사립문 열릴 때마다 문을 나서는 건

허리 굽은

바람…….

 

장다리꽃 기다리다 지친

나비는

움찔움찔 떨면서 경운기 뒤를 따라간다.

 

뒷산 산 그림자 멈춰 서서

시간이 늦게 흐르는 마을,


2011. 5. 15

posted by 청라

빈 마을

시/제3시집-춤바위 2011. 4. 24. 07:43

빈 마을

 

심심한 까치가

호들갑스레 울다 간 후

 

느티나무 혼자 지키고 선

빈 마을의 적막,

 

바람의 빗자루가

퀭한 골목을 쓸고 있다.

 

사립문 굳게 닫힌 골목의

마지막 집에


하염없이 머물다 가는

낮달의

창백한 시선


보아주는 사람도 없는

살구꽃 꽃등은 타오르는데…….

 

2011. 4. 24

 

 

 

 


posted by 청라

대보름달

시/제3시집-춤바위 2011. 2. 20. 22:19

 

대보름달



껍질을 깎을 것도 없이

날 시린 바람의 칼로 한 조각 잘라 내어

아내의 생일상에 올려놓고 싶다.


한 점 베어 물면

용암처럼 뜨겁고 상큼한 과즙(果汁)이 솟아나리.


이순의 문턱에서

검버섯으로 피어난 속앓이를 씻어줄

대보름달 같은 웃음을 보고 싶다.



2011. 2. 18

posted by 청라

버려진 그릇

시/제3시집-춤바위 2011. 1. 26. 21:23

 

버려진 그릇

-도천 선생 그릇 무덤에서

 


바늘 자국만한 흠 하나로도

나는 온전한 그릇으로 설 수 없었다. 


삼천 도의 불가마에서

온 몸이 익어가는 통증 속에서도

다향으로 목 축일

작은 꿈 하나 있어 정신을 놓지 않았다. 


가마를 나와 탯줄도 자르기 전에

눈 뜨고 응아 한 번 울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져 무덤에 버려졌다. 


찻물 한 모금 담아보지 못하고

그릇도 아니고 흙도 아닌

제 살 조각도 맞출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람들은 지나가며

안쓰런 눈으로 바라본다. 


지나가는 사람들 뒷모습에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흠들 


저 많은 흠을 두르고

어찌 사람이라고 살아가나? 


아, 하느님은

도공보다 너그럽다.


2011. 1.25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