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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변신變身
바람에는 빛깔이 없다.
빛깔이 없어
더욱 화려한 바람
오월, 상수리나무
목청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서는
물안개처럼 몽롱한 연둣빛 속살이
언뜻언뜻 보인다.
단풍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산기슭 올라가는 바람의 꽁지에서는
빛살의 창을 모두 거두고 서해로 투신하는
태양의 열정이 타오르고
겨울!
눈보라 몰고 가는 바람의 날개에서는
죽음보다 더 깊은 침묵의
하얀 정적,
빛깔이 없어
더욱 화려한 바람
바람에는 바람에는
빛깔이 없다.
2011. 5. 22
글
빈 마을
2
장다리골엔 봄이 왔어도
장다리꽃이 피지 않는다.
아이들 웃음소리 묻어나던
공회당 깃대 끝엔
찢어진 깃발처럼 구름 한 조각 걸려있고,
사립문 열릴 때마다 문을 나서는 건
허리 굽은
바람…….
장다리꽃 기다리다 지친
나비는
움찔움찔 떨면서 경운기 뒤를 따라간다.
뒷산 산 그림자 멈춰 서서
시간이 늦게 흐르는 마을,
2011. 5. 15
글
빈 마을
심심한 까치가
호들갑스레 울다 간 후
느티나무 혼자 지키고 선
빈 마을의 적막,
바람의 빗자루가
퀭한 골목을 쓸고 있다.
사립문 굳게 닫힌 골목의
마지막 집에
하염없이 머물다 가는
낮달의
창백한 시선
보아주는 사람도 없는
살구꽃 꽃등은 타오르는데…….
2011. 4. 24
글
글
버려진 그릇
-도천 선생 그릇 무덤에서
바늘 자국만한 흠 하나로도
나는 온전한 그릇으로 설 수 없었다.
삼천 도의 불가마에서
온 몸이 익어가는 통증 속에서도
다향으로 목 축일
작은 꿈 하나 있어 정신을 놓지 않았다.
가마를 나와 탯줄도 자르기 전에
눈 뜨고 응아 한 번 울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져 무덤에 버려졌다.
찻물 한 모금 담아보지 못하고
그릇도 아니고 흙도 아닌
제 살 조각도 맞출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람들은 지나가며
안쓰런 눈으로 바라본다.
지나가는 사람들 뒷모습에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흠들
저 많은 흠을 두르고
어찌 사람이라고 살아가나?
아, 하느님은
도공보다 너그럽다.
2011. 1.25
글
<신년 축하 시>
염원의 파랑새를 날리기 위해서는
엄 기 창
제야(除夜)의 종소리로 새해를 빚습니다.
신묘년(辛卯年)년의 태양이
한반도의 어둠을 쓸어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의 겨울은 참으로 추웠습니다.
땅 밑에서 고동치는 봄의 온기(溫氣)를 불러내어
상처 입은 가슴들에
연둣빛 새살을 돋게 하소서.
포격(砲擊)으로 일그러진 연평도 산하와
황운(黃雲)이 짙게 피어오르는 국토의 골골마다
비둘기의 은빛 날개로 덮어 주시고
북녘 땅 이리들의 날 세운 발톱에
강인한 족쇄(足鎖)를 채워 주소서.
사람들은 모두 다
어깨동무로 걷는 법을 잊었습니다.
정치의 마을엔 상생(相生)의 도(道)가 사라지고
경제의 마을에선 공생(共生)의 원리도 무너졌습니다.
윤리(倫理)의 깃대는 부러지고, 깃발은 찢어져
신문의 칸칸마다 무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끼니를 걱정하던 60년대부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입니다.
온 세계의 하늘을 향해 다시
염원(念願)의 파랑새를 날리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계룡산이 주위의 산들과 어깨동무로 노래하고
금강물이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흐르듯
새해에는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2011년 1월 1일 아침
<금강일보> 신년 축하시
글
원가계에서
신선도를 보고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글
독도3
눈을 뜨고 잔다.
파도에 갈리어
반달만큼 남았어도
대양을 막아선
저 완강한 등…….
글
봄비 오는 날
엄 기 창
봄비 오는 날
빗소리에
한 사람 목 맨 부음이 묻어오고
매화꽃은 한
봉오리씩
겨울 떨치고 피어나는데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3월의 눈발들이 핏기 잃은 가지마다
날선 눈꽃으로
숨을 막아도
멍든 아픔 삭혀
꽃등 환하게 일어서는 매화
아프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글
취설吹雪
마을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섬처럼 조그만 집 하나 있습니다. 비어있는 도화지처럼 온 세상은 눈 덮여 하얗고, 길 끊어진 이웃은 십리보다 멉니다. 눈보라가 파도처럼 넘실거립니다. 울타리가 지워지고, 사립문이 지워지고, 위태롭게 서 있던 작은 집도 붓질 한 번에 지워집니다. 온 세상이 지워진 도화지 위에 등대인가요, 장밋빛 불빛 비친 창문만 화안합니다.
세월이 머리위에 눈빛으로 앉은 할머니는 저녁 상 위에 모주 한 병을 올려놉니다. 참나무 울타리로 으르렁 으르렁 눈보라가 지나가는데, 상관없지요. 할머니, 할아버지 부딪치는 잔에는 흥이 익어 얼굴은 먹오디 빛입니다. 할아버지는 추억의 갈피 속에서 가장 정다운 콧노래 뽑아내어 흥얼거리고, 할머니의 몸은 조금씩 흔들립니다. 타지로 나간 자식들 목소리 기다리다 수화기 위엔 뿌옇게 먼지가 쌓였지만, 신명이 물오른 할아버지 눈가엔 섬처럼 외로운 외딴집 겨울밤도 할머니 하나 있어 향연饗宴입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길마다 가려주는 취설吹雪도 포근한 수막繡幕입니다.
2010.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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