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겅퀴 꽃의 노래

시/제3시집-춤바위 2008. 6. 27. 16:12
 

엉겅퀴 꽃의 노래


내가 어쩌다

화단 구석에 뿌리를 틀고 앉으면

사람들은 나를 뽑아내려 한다.

자주색 미소

꽃잎에 아롱아롱 피워 올려도

울음보다 못한 내 웃음을 뽑아 

풀 더미 속에 던져 넣는다.

나는 못난이 꽃

화단 전체를 빛나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내 주위의 모든 꽃들을 빛나게 한다.

땅바닥으로만 기어 다니는

채송화 꽃 가난한 속삭임을 돋보이게 하고

시들어 가는 봉숭아 꽃 몇 송이도

등불처럼

찬란하게

한다.

나는 어둠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끝없이 가라앉아

해저처럼 깊은 가슴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는

어둠이다.

내 작은 한숨의 줄기를 밟고 일어서는
빛부신 아침을 보며
분노의 가시 창날처럼 세워 편견 넘실대는
세상을 찔러봐도
분수처럼 솟아나는 건 내 안의 피
내일은 미라가 되어
햇볕 아래 말라갈 지라도
꽃잎을 세운다.
자주빛 작은 소망을 세운다.

2008. 6. 27


 

posted by 청라

九峰山 단풍

시/제3시집-춤바위 2008. 6. 14. 14:34
 

九峰山 단풍


한숨 턱에 닿아

요 봉우리만 올라가야지

생각했다가도


하늘 물살에 머리 젖을 만큼

올라가면

더 아름다운 산봉이 눈에 밟힌다.


岩峰을 불태우려고, 가을은

구봉산에 와서 폭죽을 터뜨렸다.


산불 놓아 산기슭을 달려 오르다

바위틈마다 기대어 서서

단풍으로 익었다.


아! 붉은 치맛자락 포기마다

펼쳐진

자연의 붓질,


뜨거운 몸을 식혀주려고

구봉산 휘돌아 흐르는 갑천도

넋 잃고 있다.


투신하는 산 그림자

차곡차곡

가슴에 품어 안고 있다.




posted by 청라

보문산 녹음

시/제3시집-춤바위 2008. 5. 23. 15:38
 

보문산 녹음



진녹색 함성이다.


그 함성에 몸을 담그면

나도 나무가 된다.


은행동에서 일어난 바람이

술래가 되어

나를 찾으러 왔다가


내쉬는 내 숨결에

초록빛이 떠돌아

두리번대다 돌아갔다.


보문산 녹음은 너무 커서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산새소리 한 모금에도

귀를 열 줄 아는 사람은 

산그늘 속에 녹아 모두 녹음이 된다.


2008. 5. 23

e-백문학3(2020)

posted by 청라

고개

시/제3시집-춤바위 2008. 5. 16. 21:36

    고개


    장승은
    사람 목소리가 그리워
    고개 아래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터널이 뚫린 뒤로
    인적 끊긴 성황당 고갯마루….


    돌탑에 담겨있던 소망들은
    장마 비에 씻기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
    성황나무는 귀가 다 달았다.


    야위어가는 길 따라
    추억이여
    너도 돌탑처럼 무너져 풀숲에 묻히겠지.


    2008. 5.16
posted by 청라

산사(山寺)

시/제3시집-춤바위 2008. 4. 30. 14:39
 

산사(山寺)



보리수나무 아래 여승이 하나

번뇌의 열매를 줍고 있다.


반쯤 열린
법당 문 사이로

만수향 향내 절마당을 덮으면


염불로 닦여지는 보리수 열매


번뇌의 때
한 겹씩 벗겨지고

탑은 함성으로 일어서고


여승의 얼굴

구름 걷힌 자리


햇살 가루 내어 뿌리듯

반짝이는

입가의 미소


2008. 4.30

posted by 청라

바람개비

시/제3시집-춤바위 2008. 3. 21. 17:20
 

바람개비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며

바람개비를 돌린다.

이순의 길목에서

반짝이던 사랑을 모아

아픔이 노을처럼 고이는

하루의 끝에 서면

어둠이 내려오는 골짜기마다

눈물로 반딧불은 날아오르고,

바람의 켜켜마다 숨은

세월(歲月)의 이야기로

깃발 펄럭이듯 돌아가는 바람개비.

누구에게 보내는 간절한 노래인가.

저무는 들판엔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도 없고,

시간이 피었다 지는 풀숲 언저리로

이름 모를 들꽃만 고개를 내미는데

기다림의 노래가 곱게 배인

한지(韓紙)의 날개마다

건강한 바람

심지를 세우고

돌려도 돌아오지 않을

새벽을 기다리며

작은 날갯소리 그대 마음에

등대처럼 반짝이도록

모든 것이 비워지는 빈 들판에서

작은 것을

채워주는

바람개비를 돌린다.


posted by 청라

남가섭암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27. 09:23
 

남가섭암


사바세계 신음소리

가장 잘 보이는 산정 위에

남가섭암


상수리나무 잎 스쳐가는

푸른 바람에

목탁소리를 실어 보내 다독여주고


천수경 자락에 묻은

뻐꾸기 소리

한 모금에도


적막을 못 견디어

제 살 비비는

억새풀 하나


posted by 청라

봄의 들판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21. 09:56
 

봄의 들판에서


초록빛 숨결 움터오는

봄의 들판에 서면


굳게 동여매진 사랑의 매듭이

풀릴 것 같아


내 눈빛이

당신의 마음에

냉이 맛으로 전해질 수 있다면


꽁꽁 얼어붙은

당신의 겨울에

작은 제비꽃 한 송이 피울 수 없으랴.

posted by 청라

서해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8. 08:20
 

서해


돌을 닦는다.

기름 속에 묻혀있던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난다.


속 빈 조개껍데기와

검은 기름에 찌든 미역 속에 배어있는

어부의 눈물


세월이 갈수록 씻어지지 않는

바위 같은 슬픔이 여기 있다.


눈이 내려서 백장에 쌓여도

덮어도 덮어지지 않는

저 긴 해안선 위의 절망


기름 물로 목욕한 갈매기들은

날아오르다

지쳐서 쓰러지고


하얗게 배를 드러낸 물고기

물고기의 살밑으로 스며드는

저 짙은 어둠

 

파도는 오늘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서해의 신음을 닦아내고 있다.


.


posted by 청라

弔 숭례문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6. 16:29
 

弔 숭례문


유세차

무자 2월 신사 삭

오, 애재라

불꽃 속에 사라진 숭례문이여


미명의 새벽 서울 하늘

붉게 물들인 화광이

사람들의 새벽 꿈밭을 불태울 무렵


나는 들었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가장 소중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를


숭례문이여!

육백년 넘게 우리를 지켜온

너는 역사의 증인.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비껴서 갔다네.

일본놈도 떼놈도

고갤 돌리고 갔다네.


남들도 우러러 피해간

성스러운 가슴에

우리 스스로 불을 놓았구나.

민족의 얼을 살라 버렸구나.


이제 다시 옛모습 다시 세운다 해도

수많은 세월 지켜본 네 기억

사라진 역사는 어이할이거나.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