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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년 축하 시>
염원의 파랑새를 날리기 위해서는
엄 기 창
제야(除夜)의 종소리로 새해를 빚습니다.
신묘년(辛卯年)년의 태양이
한반도의 어둠을 쓸어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의 겨울은 참으로 추웠습니다.
땅 밑에서 고동치는 봄의 온기(溫氣)를 불러내어
상처 입은 가슴들에
연둣빛 새살을 돋게 하소서.
포격(砲擊)으로 일그러진 연평도 산하와
황운(黃雲)이 짙게 피어오르는 국토의 골골마다
비둘기의 은빛 날개로 덮어 주시고
북녘 땅 이리들의 날 세운 발톱에
강인한 족쇄(足鎖)를 채워 주소서.
사람들은 모두 다
어깨동무로 걷는 법을 잊었습니다.
정치의 마을엔 상생(相生)의 도(道)가 사라지고
경제의 마을에선 공생(共生)의 원리도 무너졌습니다.
윤리(倫理)의 깃대는 부러지고, 깃발은 찢어져
신문의 칸칸마다 무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끼니를 걱정하던 60년대부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입니다.
온 세계의 하늘을 향해 다시
염원(念願)의 파랑새를 날리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계룡산이 주위의 산들과 어깨동무로 노래하고
금강물이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흐르듯
새해에는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2011년 1월 1일 아침
<금강일보> 신년 축하시
글
원가계에서
신선도를 보고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글
독도3
눈을 뜨고 잔다.
파도에 갈리어
반달만큼 남았어도
대양을 막아선
저 완강한 등…….
글
봄비 오는 날
엄 기 창
봄비 오는 날
빗소리에
한 사람 목 맨 부음이 묻어오고
매화꽃은 한
봉오리씩
겨울 떨치고 피어나는데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3월의 눈발들이 핏기 잃은 가지마다
날선 눈꽃으로
숨을 막아도
멍든 아픔 삭혀
꽃등 환하게 일어서는 매화
아프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글
취설吹雪
마을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섬처럼 조그만 집 하나 있습니다. 비어있는 도화지처럼 온 세상은 눈 덮여 하얗고, 길 끊어진 이웃은 십리보다 멉니다. 눈보라가 파도처럼 넘실거립니다. 울타리가 지워지고, 사립문이 지워지고, 위태롭게 서 있던 작은 집도 붓질 한 번에 지워집니다. 온 세상이 지워진 도화지 위에 등대인가요, 장밋빛 불빛 비친 창문만 화안합니다.
세월이 머리위에 눈빛으로 앉은 할머니는 저녁 상 위에 모주 한 병을 올려놉니다. 참나무 울타리로 으르렁 으르렁 눈보라가 지나가는데, 상관없지요. 할머니, 할아버지 부딪치는 잔에는 흥이 익어 얼굴은 먹오디 빛입니다. 할아버지는 추억의 갈피 속에서 가장 정다운 콧노래 뽑아내어 흥얼거리고, 할머니의 몸은 조금씩 흔들립니다. 타지로 나간 자식들 목소리 기다리다 수화기 위엔 뿌옇게 먼지가 쌓였지만, 신명이 물오른 할아버지 눈가엔 섬처럼 외로운 외딴집 겨울밤도 할머니 하나 있어 향연饗宴입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길마다 가려주는 취설吹雪도 포근한 수막繡幕입니다.
2010. 1. 21
글
아파트 까치
늦은 아침
아이들 놀이터 벚나무 위에서
까치가 요란스레 울고 있다.
아파트 문은 모두 닫혀있고
유치원도 못 갈 어린애 혼자 듣다가
모래만 뿌리고 심심해서 돌아갔다.
맑은 아침 햇살 물고 와
자랑스럽게 울고 있는 까치야
우리 마을엔 네 울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 아무도 없다.
생활에 쫓기는 도회지 사람들에겐
반가운 사람이란 아예 없는데
반가운 손님 온다고 아무리 울어봐라.
한나절 소식 전하다 지쳐
비둘기들 사이에 섞여 모이나 주워 먹다
자동차 경적에 놀라 비명처럼 쫓겨가는
비둘기의 날개 너머로
너무도 눈시린 가을…….
2009. 10. 23
글
3m
당신들의 그 새벽엔
하나님도 조상들도 아무도 없었다.
새벽 산책길, 3m 간격
그것이 삶과 죽음의 거리였다.
길 건너 도솔산이
부르는 대로
아내는 웃으며 도로로 들어서고
하늘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15m를 날아
아스팔트 바닥에 산산이 부서졌다.
너무도 맑아 바라보기도 아깝던
한 송이 짓이겨진 코스모스 꽃이여
피 묻은 향기는 하늘하늘 날아
먼 길을 가고
남은 사람의 앞길에
가로놓인
저 막막한 사막
새벽 산책길, 3m 간격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였다.
2009. 10. 6
글
산이 되기 위해
관음봉
꼭대기에 올랐다.
사랑, 미움 구름으로 날린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재어보던 그만큼
하늘은 더 높아졌지만
산 위에 다섯 자 반쯤
키를 보탰으면
입 다물고 산이 되어야지.
이름표를 떼고
장송 옆에 서서
내 마음 아궁이에 초록 불을 지핀다.
2009. 9. 25
글
생가 터에서
안부가 궁금해서
안테나처럼
회초리 하나 쫑긋하게 내세운 밤나무
가지 끝에는
썩은 둥치의 부피만큼 머물렀던
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
밤 잎으로 피어
그늘 속에
아버님 기침 소리
재주 있는 자식들 대처로 학교 못 보내
밤 내 콜록거리던 아버님의 각혈
육이오사변 통에 약 한 첩 못 써보고
자식 둘 먼저 보낸
피멍 얼룽이는 어머님 눈물
한숨 얽어 베 짜는 소리
연실이만 보면
가슴 설레던
무지개 추억들은 다 지워지고
웃자란 콩 포기 아래 묻히다 남은
주춧돌에 걸터앉으면
한여름이 달궈놓은 알큰한 온기처럼
오늘을 씻어주는
그믐 빛 따스한 추억
2009.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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