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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낭나무
꽹과리 소리도 멈췄다.
달그림자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속 빈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있을 뿐이다.
무나물에 밥 한 그릇도 받지 못하고
낡은 오색 천들만 힘겹게 꿈틀거릴 뿐.
아랫마을 고샅마다 집들이 비고
철마다 빌어주던 사람들의
믿음 다 떠나가고
길을 넓히려면 베어버려야 한다는
도낏날 번득이는 소리에 얼이 빠져서
삼신바위 올라가는 솔숲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
후드득 몸을 떠는
신기(神氣) 잃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있을 뿐이다.
2015년 6월 29일
<문학저널>2015년 11월호
글
목척교 戀歌
비오는 날 목척교에 나가보자.
슬픈 눈빛의 여인 하나 만날 것 같다.
소주 한 잔에 체온을 나눠 마시며
황톳물에 퍼다 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 젖은 사연
도란대는 물소리 듣다가보면
우리들의 슬픔은
바람에 스쳐가는 자잘한 이야기일 뿐.
보문산 소쩍새 소리 불러다가
그녀의 진회색 미소 위에
목거리처럼 걸어줬으면 좋겠다.
교각에 걸려있는 영롱한 불빛으로
마음 밭에 숨어있는 그늘을
말끔히 씻어줬으면 좋겠다.
봄이면 그네 뛰고 놀던 추억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목척교에 서면
대전천 물들은 서 있는데
우리들의 사랑은 어디론가 흘러간다.
2015년 6월 12일
<대전문학>69호(2015년 가을호)
<심상>2016년 6월호
글
장미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인가
서둘러 담 위로 기어 올라와
고갤 길게 내밀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저 불타는 갈망,
빈 골목길 회오리바람에 검불만 날려도
온몸 떨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다.
지난겨울 혼자 살던 할아버지 산으로 가고
대문 굳게 닫힌 울안
빈 집 속의 적막으로 봉오리 부풀려
한 등 눈물로 켜든 저 짙붉은 외로움.
2015년 6월 2일
『대전문학』2016년 여름호(72호)
『심상』2016년 6월호
『한국 시원』2018년 여름호(9호)
글
스승의 날에
철쭉꽃 모여
타오르는 산
가까이에서 보면
가끔은 벌레 먹은 꽃잎도 있네.
꽃잎 하나 태우려고
모두가 저 꽃밭에 불을 지르는가!
스승의 날에…….
2015. 5. 15
글
보성 차밭에서
엄 기 창
차나무 가지 끝마다
혼(魂)불 환하게 밝혀드는
저 연초록 손들을 보아라.
흰 눈을 이고 견딘 겨울의
뚝심을 모아
쌉싸래한 맛 속에 숨어있는
상큼한 차향(茶香)을 일으켜 세우나니
삼나무들도 어깨동무하고
눈짓 주고받으며
제암산(帝巖山) 정기를 퍼내어 끝없이 보내주고 있다.
득량만(得粮灣) 파도야,
대양(大洋)을 치달리던 폭풍의 노래들을
엽록소에 담아주려고
밤새도록 뻘밭을 기어오르느냐.
보성 차밭머리에서
성스러운 차 한 잎을 피우기 위해
정결한 머리로 기도하는 오선(五線)의
선율에 취해
다시는 일상(日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2014. 4. 25
<문학사랑> 2015년 여름호(112호)
글
歲寒圖에 사는 사내
그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사방으로 열려서 신바람 난 바람이
울 밖 같은 울안을
한바탕 휘젓다 가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 집 사내는
청청한 외로움을 가꾸기 위해
덩굴장미 한 그루 심지 않았다.
덩그렇게 세워 놓은 네그루의 소나무에도
새 한 마리 불러오지 않았다.
제대로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평생을 마음 밭에 겨울만 들여놓고
뜰 밖을 둘러 친 울타리 대신
서릿발 같은 기상 온 몸으로 반짝이며
아예 방문을 지워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다.
2015. 4. 17
<대전문학>68호(2015년 여름호)
글
수왕사
향냄샌가
숨을 크게 들이쉬면
나무 냄새
독경 소리인가
귀를 쫑긋 세우면
바람 소리
단청을 지우고
사바로 통하는 길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한 파람 남겨두어
모악산 제일봉에
내려왔던 부처님
간절한 발원發願 소릴
제일 먼저 듣는 절
2015. 2. 27
글
행복
아내의 칼 도마소리는
기도이다.
기도의 울림으로 더욱 고요로운
창가에 앉아
찻잔에 햇살을 풀어 마시면
아파트 정원수 흔들고 달아나는
바람소리도
대숲 바람소리로 들을 수 있다.
창밖 먼 산 초록빛이
봄을 이고 달려와 가슴에 안긴다.
봄하늘로 나른한 눈을 헹구고
아내를 바라보면
새싹처럼 돋아나는 행복
아내가 거기 있어서
집안은 늘 따뜻하다.
2015. 1. 12
글
대청호 가을
물빛이 하늘을 닮아
한없이 깊어지는 가을 무렵에
다섯 살 손자 놈 손목을 잡고
대청호 풀숲 길을 걷고 있었다.
생명의 음자리표가
점차로 낮아지는 길모퉁이에서
사마귀 한 마리 마지막 식사를 하려고
두 발로 메뚜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메뚜기 죽는다고
팔짝팔짝 뛰는 손자 곁에서
인과의 어두운 그늘이 고 놈에게 드리울까봐
한참을 망설이고 서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무서워 지르는 손자의 외마디에
깜짝 놀라 눈을 돌리니
사마귀의 강인한 턱이 메뚜기 머리맡에 다가와 있었다.
자연의 바퀴 속에서 생명은 피고 지지만
업연의 짐을 피하기 위해
눈앞에서 한 생명을 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손자 놈 어려울 땐 메뚜기 제가 도와주겠지.
손등으로 사마귀 머리를 탁 치니
메뚜기 신나게 풀숲을 뛰어갔다.
메뚜기의 등 뒤로 저녁 햇살이 모여들었다.
어둠이 가장 두꺼운 대청호 깊은 곳, 내 마음밭에는
하늘의 밝은 별이 내려와 반짝이고 있었다.
2014. 12. 19
<시문학> 2015년 2월호
글
후회
엄 기 창
아침노을 붉게 물든
하늘 한 자락 오려다가
어머님 주무시는 아랫목에
깔아드리고 싶어라.
찬바람 눈보라가 문풍지에 매달려서
밤새도록 으르렁대는 겨울밤에도
어머님 이불 속만은 고운 꿈 피어나게.
이순 넘어 깨달으니 너무 늦어버렸어라.
아침마다 노을 곱게 피어도
덮을 사람 아니 계시네.
아프고 서러운 시절 눈물만 보태드리고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그 시절 다시 오리.
201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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