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눈꽃


계룡산 등산 길에

온 산 가득 핀 눈꽃을 보았다.


함께 견딘 세월이

나무 가지마다 수많은 이야기로 꽃눈 틔워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저 우렁찬 침묵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나는 알겠다.


봄날 능선마다 연분홍 꽃으로 노래하고

여름에는 초록빛 잎들 흔들어 바람 불러오고

가을에는 무지개 빛으로 온몸을 불태운 것이

저 무채색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한 몸짓이었음을


오!

차가워서 더욱 눈부신

나의 여신이여!


가까이 다가가서

따뜻한 입김을 전하면

눈물처럼 녹아내리는 먼 나라의 공주여!


눈꽃이 봄날의 꽃들보다 

아름다운 것은

투명한 햇빛마저 튕겨내는 고고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봄꽃들은 나무마다 같은 몸짓을 하고 있는데

눈꽃은 같은 나무라도

가지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로 피어나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가지마다 다른 노래를 부르고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가지마다 다른 노래를 부르고


이윽고 가지마다 나무마다

저마다의 목소리로 화음을 이뤄

온 산이 우렁우렁 노래하는 것이 아니냐.


산을 오르다 말고 나는

눈꽃들의 합창에 취해

홀린듯이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2014. 12. 15

<시문학> 2015년 2월호



posted by 청라

맹방 앞바다에서

맹방 앞바다에서

 

 

때로는 삶의 조각들 헝크러진 채

그냥 던져두고

입가에 미소 번지듯 가을이 물들어가는

산맥을 가로질러 와

대양과 마주 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있는 힘껏 키워 돌진하는

저 바다의 거대한 남성

수만 번 부딪쳐 피워내는 파도 위의 포말

예순네 살 침묵하던 나의 젊음이

용틀임하며 끓어오르는 힘줄을 보았다.

맹방 백사장에서 술에 취해

바다를 향해 오줌을 갈기면

천 년의 수로부인도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는 희미한 달빛

밤내 아우성치는 원시의

바람을 모아

한 송이 해당화를 피워놓았다,

 

 

2014, 10, 13

<대전문학>67호(2015년 봄호)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

돝섬

돝섬

 

 

황금 돼지 끌어앉고

복을 빌지 말자.

 

돝섬은

복을 받으러 오는 곳이 아니라

가진 것 버리고 버려

마침내 피부 속에 낀 녹까지 다 닦아내고

 

남쪽 산기슭

대양으로 가는 길목에

허허한 바위가 되기 위해 오는 곳이다.

 

머리 위에 갈매기

리본처럼 얹은 채로

 

섬에 뿌리 내리고

자연으로 숨쉬다가 가는 곳이다.

 

 

2014, 9. 28

"대전문학' 66호(2014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잠 못 드는 새벽

잠 못 드는 새벽

 

 

사십 년 삶의 그림자에

손 흔들고 돌아설 때에

모든 것 다 놓고 온 줄 알았네.

 

새벽에

문득 잠 깨어

열린 창으로 비치는 달을 보니

 

웃음 해맑은 아이들

얼굴 따라와 있네.

바람소리인가, 아이들 목소리도 들리네.

 

다시 잠을 청해도

까르르 까르르

어두운 방 안 가득 피어나는 꽃들

 

손바닥 맞은 놈들

손 다 나았을까,

무슨 욕심으로 마지막까지 그리 때렸을꼬!

 

잠 못 드는 새벽에

다시 헤아려보니

다 버리고 온 줄 알았는데

실은 하나도 버리지 못했구나.

 

 

201495

'대전문학' 66호(2014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춤바위

시/제3시집-춤바위 2014. 7. 25. 10:13

춤바위

 

나는

영혼의 샘물처럼

맑은 시구 하나 찾아

헤매는 심마니

 

아무리 험한 골짜기라도

시의 실뿌리 한 올

묻혀 있다면 찾아갑니다.

 

칡넝쿨 아래 숨은 절터를 찾고

춤바위에 올라

흥겹게 춤추었던 자장율사처럼

 

반짝이는 한 파람

가슴을 울리는 노래에도

춤바위에 올라가 춤추는 학이 되겠습니다.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산삼밭을 만난다면

끝없이 춤추다가 돌이 되겠습니다.

posted by 청라

스타킹

시/제3시집-춤바위 2014. 6. 27. 21:28

스타킹

 

 

은밀한 바위 틈

뱀이 벗어놓은

긴 허물 하나,

 

올해는

오는 걸 잊었는가!

밤이면 별빛 새는

꾀꼬리 집에

 

발 벗어 못 오면

신고 오라는

별빛 뽑아 짜놓은

스타킹 하나.

 

2014. 6. 27

posted by 청라

시/제3시집-춤바위 2014. 6. 10. 20:18

 

걷다 보면 길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네.

 

돌아보면 나의 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었어.

 

예쁜 꽃들이 언제나

건강하게 웃어주었고

 

상큼한 바람들이

내가 뿌려주는 물 더 촉촉하게 적셔 주었지.

 

씨 뿌리고 거름 주는 일

신나는 일이었네.

 

나무들이 자라서 숲을 이루고

어두운 세상

한 등 한 등 밝히는 일 신나는 일이었네.

 

내 길이 끝나는 곳에 솔뫼가 있고

솔 꽃들아!

너희들의 향기 속에서 닻을 내리니 행복하구나.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 길을 걷고 싶네.

 

때로는 바람 불고 눈보라도 날렸지만

이 길은 내게 천상의 길이었네.

 

2014. 5. 22

  

posted by 청라

생명의 선

시/제3시집-춤바위 2014. 5. 27. 18:59

생명의 선

 

 

고속도로에서

신나게 달리는 콧노래 속으로

잠자리 한 마리 날아든다.

 

저리가저리가저리가저리가저리가저리가저리가저리가

 

내 비명에 부딪혀 추락하는

작은 몸뚱아리

 

도망가도 도망가도

유리창에 붙어 따라오는

잠자리의 단말마

 

유월의 초록빛 산하가

피에 젖는다.

내가 끊어놓은 생명의 선이

바람도 없는데 위잉 위잉 울고 있다.

 

 

2014. 5. 27

posted by 청라

사랑싸움

시/제3시집-춤바위 2014. 5. 20. 23:02

사랑싸움

 

 

사랑싸움에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진다.

 

아내와의 싸움엔

내가 늘 진다.

 

싸움도 꽃이라면

우리 화원엔

지는 꽃 빛깔이 더 찬란하다.

 

 

2014. 5. 20

posted by 청라

심청이 연꽃으로 피어오르듯

시/제3시집-춤바위 2014. 4. 19. 08:54

심청이 연꽃으로 피어오르듯

 

 

심청이 인당수에서

꽃으로 지듯

세월호에 갇힌 넋들 꽃비 오듯 지던 날은

 

심 봉사 온몸으로 울던

몸부림처럼

바다도 하루 종일 웅얼거렸다.

 

소금보다 짠 사람들의 눈물을 모아

자다가 소스라쳐 울부짖는

애비 에미의 아픔을 모아

용왕님께 빈다면

 

심청이

연꽃으로 피어오르듯

한 송이씩 해말간 얼굴들

“엄마” 부르며 피어나서

 

진도 옆 온 바다가

온통 연꽃으로 물들어 출렁였으면 좋겠네.

 

오늘 아침  대한 사람들 모두

심 봉사 눈 번쩍 뜨고

손뼉 치며 일어나듯

 

“와!!!!!!!”

하는 함성으로 강산이 무너졌으면 좋겠네.

 

 

2014. 4. 18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