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접의 물

한 대접의 물

 

 

해오라기는 서두르지 않는다.

가뭄에 밀리다

반달만큼 남은 마지막 물웅덩이

목숨끼리 부딪쳐 깨어지는

여기에서는

생명은 생명이 아닌 것이냐!

나는 갑자기

입술이 갈라터진 아프리카 소녀가 생각났다.

한 대접의 물로는

한 생명도 살릴 수 없지만

네가 부어주고 또 내가 붓다 보면

연못이 다시 넘치지 않겠는가.

 

 

2016. 9. 16

posted by 청라

뿌리에게

뿌리에게

 

 

꽃이 되지 못했다고

서러워 말아라.

이른 봄부터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여

싹을 틔우고 잎을 키워낸

네가 없었다면

어찌 한 송이의 꽃인들

피울 수 있었으랴.

 

꽃이 박수 받을 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묻혔다고

울지 말아라.

세상에 박수 받던 것들은

쉬이 떠나가고

장막 뒤에 숨어있던 너만 살아 반짝일 때

그림자이기에 오히려 빛나는

뿌리의 의미를 알 것이다.

 

 

2016. 8. 19

『한국 시원』2018년 여름호(9호)

 

posted by 청라

대못

대못

 

 

도라지꽃 핀 돌무덤은

긴 대못이었다.

웃음꽃 벙글 때마다

어머니 가슴을 찔러

피멍울 맺히게 하는

뽑지 못할 대못이었다.

육이오 사변 통에

돌무덤에 묻혀

밤이면 부엉이 울음으로 울던 형

부엉이 울음 달빛으로 깔리던 밤

부엉이 울음 따라 나도 갈까봐

가슴에 꼭 안고서 지새우던 어머니

기억의 창문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길고 긴 한평생을 대못에 꽂혀

환하게 웃던 모습 본 적이 없다.

 

2016. 8. 2

posted by 청라

행복

행복

 

 

저녁때 집에 돌아오면

집안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아내의 싱싱한 웃음이 맞아주니

행복하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아내의 하루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만이지.

삼십 년도 더 뒤에 등단한 친구에게

수상 대상자에서 밀렸으면 어떤가.

반백년을 시를 썼어도

애송시 한 편 못 남기면 어떤가.

며칠 만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서

잘 있다는 전화가 오고

카카오톡에는 손자 손녀들의 예쁜 사진이 쌓여가고 있다.

받아쓰기 이십 점을 받아오면 어떤가.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시들지 않으면 그만이지.

우리들은 가끔 행복에 취해

평범한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엊그제 낸 시집이 팔리지 않아도

행복하다.

산나리꽃처럼 주위를 밝히는

촛불로 살아가면 족한 일이지

불행을 깎아 시를 빚어서

심금을 울리는 시로 빛나고 싶지는 않다.

 

2015. 7. 25

posted by 청라

유골함 이야기

유골함 이야기

 

유골함에 유골이

담기기 전엔

한없이 자유로운 빈 그릇이었지.

맑은 하늘과 소통하며

뻐꾸기 울면 뻐꾸기 노래 채우고

바람이 불면

찰람찰람 바람을 채웠지.

외로움이 없으니

비워낼 일도 없었지.

무언가로 채워야 할

사랑을 알 나이쯤

낯선 사람의 인생을 태운

이름이 가득 들어차면서

이제는 마음대로 비울 수도 없는

하늘 향해 꼭꼭 봉해진 유골함이 되었지.

 

2016. 7. 18

시문학201610월호

 

posted by 청라

어느 시인의 죽음

어느 시인의 죽음



시인을 묻고 돌아왔네.

주인 잃은 시들만

떠다니고 있었네.

그가 있어서 반짝이던 세상은

한 이름이 지워져도

빛나고 있었네.

아내도 자식들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허물을 지우듯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곤한 잠에 취하겠지.

친구들도 가끔 술안주처럼 씹다가

언젠가는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그가 키운 시들은

몇 그루나 살아남을까

시인이 비운 빈 자리에

꽃은 피고

아이 울음소리 울린다.

 

2016. 7. 18

시문학201610월호

posted by 청라

추모시

 

삶의 스승

                 - 임강빈 선생님 보내는 자리에서

 

 

 

선생님을 만나기 전

청와집속의 모일某日에 반해

내 마음 속에 시의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강릉의 바닷가 선술집에서

처음 술잔을 부딪치며

시를 말씀하실 때

나는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 곁에 서면

늘 금강의 편안한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큰 소나무 솔향기가 풍겼습니다.

 

입 다물고 가만히 계실 때에도

큰 말씀이

마음으로 건너왔습니다.

 

너무도 따뜻해서

모닥불 같았던

잔잔한 미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눈보라 속 무수한

를 남기고

 

선생님의 발걸음은 이제

바람이 되신 건가요?

시를 쓰시다 말고

달 따라 가신 건가요?

 

선생님은 가셨지만

나는 아직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삶의 스승으로 내 가슴에

영원히 피어있을 겁니다.

posted by 청라

계곡에서

계곡에서

 

 

장맛비 그친 날 아침

산의 사타구니가 쏟아내는 물소리에

큰스님 젊음이 서서

 

선연히 피어난

나리꽃 한 송이


2016. 7. 4

posted by 청라

연꽃

연꽃

 

끓어오르는 사랑

물밑에 재워놨더니

 

스스로 익어

폭죽처럼 터져버린

 

저 황홀한

고백,

 

고백.

 

posted by 청라

갇힌 바다

갇힌 바다

 

 

방파제들이 쇠사슬처럼

바다의 자유를 옭아매고 있다.

 

갈매기도 사람 목소리로 운다.

 

밤 내 불빛에 지친 바다가

낮은 물결로 뒤척이며

신음을 하면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소망들과

술 취한 사람들이 던진 욕설이

부유물 되어 떠다니고 있다. 


기름띠에는

떠오르다 만 무지개가 걸려있다. 


만선의 꿈을 접은 낡은 어선들이

닳아지는 생명줄에 매달려 사는 곳 


견고堅固한 항구에는

분노 한 번 포효咆哮하지 못한 바다가

갇혀있다.

 


2016. 6. 2

대전문학73(2016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