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편지

제비꽃 편지

 

 

별을 따다가 뿌려놓은 듯

제비꽃 모여 피었습니다.

햇살은 꽃밭에만 흥건히 고여

등잔불 연기처럼

아지랑이를 피워 올립니다.

어느 날 갑자기

처마 밑에 제비 날아와 울 듯

그렇게 오셔요.

들불처럼 번져가는 자줏빛 함성.

 

 

2017. 2. 3

posted by 청라

유등천에서

유등천에서

 

 

열병식 하듯 줄지어선

갈대들의 춤사위도 시들해지고 있었다.

해오라기 눈동자가

물비늘로 일렁이는 여름날 오후

 

스쳐가는 사람들은 모두 타인이었다.

내 그림자 혼자 따라와

반짝이는 외로움

 

저기 가장교 물아래로 달리는

트럭의 바큇살마다

비누거품으로 만든 구름이 피어나고

 

발을 다친 소음騷音들은

모두 유등천으로 내려와

뿌연 물이끼로 자라고 있었다.

 

일광의 화살들을 막고 서있는

버드나무 아래엔 손수건만한 그늘 하나


어딘가로 보내는 간절한 소식처럼

계룡산 쪽으로

새 한 마리 띄워보낸다.


 

2017. 1. 17

<대전문학>75(2017년 봄호)

 

posted by 청라

송신送信

송신送信

 

 

눈 내리는 저녁 좋은 사람과

복 지느러미 정종 한 잔 마셨습니다.

가슴에 가득 찼던 겨울바람도

안에서부터 따뜻해졌습니다.

술 한 모금 속에 담긴 복 지느러미 싸한 향기가

말초신경 끝에서 반짝 등을 켜들 때

좋은 사람아

빛의 산란散亂 속에서 춤추며 쌓이는 눈은

당신을 좀 더 잡고 싶은 내 마음입니다.

 

 

2016. 12. 30

<대전문학>75(2017년 봄호)

posted by 청라

솔숲에서

솔숲에서

 

 

한 나무 가지에 황혼이 오면

물색모르는 나무들은 박수를 친다.

햇살 향해 오르는 발걸음

가벼워진다고

 

나무들은 알고 있을까

 

한 나무가 아프면

모든 나무가 아프고

모든 나무가 아프면

곧 숲이 황폐해진다는 것을.

 

파란 속삭임으로

손잡고 서있던 나무가 넘어질 때

너털웃음 웃으며

송화를 더 많이 피워 올리는 나무들아

 

숲에 해가 기울기 시작했으니

너희들의 황혼도 멀지 않았다.

 

 

2016. 12. 27

문학저널163(20176월호)

posted by 청라

적색경보

적색경보

 

 

할머니 백발 위에 얹힌 호접 핀처럼

낮달이 하나 피뢰침에 꿰어

파르르 떨고 있는 늦가을 오후

바람을 타고 도시를 탈출하다

십자가에 목 잡힌 나의 비닐봉지는

비명처럼 검은 종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사방에서 찍어대는 카메라 소리에

은밀한 비밀들은 낯선 모니터에서

수십 번씩 재생되고

고층건물의 우람한 근육에 막힌 길들은

가닥가닥 끊어져 바람에 펄럭인다.

발자국마다 넘치는 자동차 소리 밟아가면서

으악새 소리로 마중 나온

산의 눈짓을 따라가다 보면

미친 듯 경련하는

플라타너스 마지막 잎새의 불안

내 마음의 신호등엔

반짝 하고 빨간 불이 켜진다.

 

 

2016. 12. 15

심상 20176월호

 

posted by 청라

인연

인연

 

 

아내는 아침 저녁

당약을 꼭꼭 챙겨주면서도

아이들 입맛을 위해

반찬에 물엿과 매실 엑기스를 들이붓는다.

내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의 주름살이

진심임을 안다.

아주 자주 아이들에 대한 사랑 앞에

바람에 날려보내는 플라타너스 잎새라 해도.

하나의 인연은 동아줄이 아니다.

새로운 인연과 만나고 얽히면서

뒤로 밀리기도 하고 가끔은

끊어지기도 하지만

아내의 눈가에 내비치는 아름다운 근심 때문에

나는 오늘도 설탕 투성이의 음식을

불평 없이 먹을 수밖에 없다.

 

 

2016. 12. 10

 

posted by 청라

늦가을 소묘素描

늦가을 소묘素描

 

 

할아버지 끌고 가는 리어카 위엔

할머니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다.

자가용은 못 태워줘도, 임자

리어카는 실컷 태워줄끼다.

힘들어서 워쩐대요. 워떠칸대요.

올라가는 고갯길 바람이 살짝 밀어준다.

마른 수숫대 같아서 눈물 나는 사람

늦가을 햇살처럼 스르르 사라질까봐

뒤돌아보며 자꾸 말 걸며 숨차게 올라간다.

 

 

2016. 12. 1

posted by 청라

이상한 나라

이상한 나라

 

 

꽃 한 송이 받아도

벌을 받는 나라


물 한 모금 주어도

죄가 되는 나라

 

정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나라

 

국민들은 죽어나도

웃고 있는 나라


내 손자 손녀가 

살아갈 나라


이 쪽 저 쪽 돌아봐도

막막한 나라

 

 

2016. 11. 23

posted by 청라

이 가을에

이 가을에

 

 

술잔에

들국화 한 송이 띄웠다.

 

! 가을 냄새

 

술 마시고

나는 가을에 취해버렸다.

 

인생 뭐 별 거 있는가.

웃으며 살면 그만이지

 

넘기 힘든 고개도

한 발 한 발

넘다 보면 정상이라네.

 

찌푸리고 살지 말고

가을이 오면

그냥 단풍이 되세.

 

 

2016. 11. 20

posted by 청라

둥치에 핀 꽃


사진  김주형



둥치에 핀 꽃

 

 

젊음은 벽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불의不義한 역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내 피를 연소燃燒시켜

거친 땅에 정의正義를 세운다.

 

사월의 눈보라 앞에서도

굳센 정신의 심지에 불을 붙여

 

사랑을 완성한

저 꽃을 보라.

 

청춘은 쉽게 꺾이지 않아서

외로워도 아름답다.

 

2016. 11. 18

문학저널163(20176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