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 아름답게 살다 간 김영우 시인을 추모하며

 

            

꽃처럼 산 사람

지고 나서도 꽃

 

세상을 맑게 씻어주는

사람의 향기여

 



문학사랑126(2018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산책길에서

 

 

아침 길에서 만나면

반가운 사람이 있고

 

인사를 해도

안 만나는 것만

못한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침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환한 꽃을 달아줄 수 있을까.

 

잎이 유난히 더 곱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서

 

산골 물 같은 하늘에 헹궈

웃음 한 조각

반짝반짝 닦아본다.

 

 

2017. 11. 7

시문학20183월호

posted by 청라

단풍

단풍

 

 

삶을 어떻게 가꾸어야만

저런 빛깔로 익어갈 수 있을까

 

산은

세상의 아픔들 모두 모아

담뿍장처럼 삭히고 있다.

 

빨강, 파랑, 노랑

하나씩 들춰 보면

톡톡 쏘는 뾰족한 것들인데

 

가마솥에 모아 끓이듯

젊은 날의 모든 아우성

저렇게 뒤섞여 녹고 있는가.

 

내 나이 칠십 언저리

바람이 차가울수록 짙어지는

산의 홍소哄笑에 함께 물들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2017. 11. 5

 대전예술201712월호

순수문학201810월호(299)

 

 

posted by 청라

남가섭암 불빛

 

 

어머니 제사 지내러 늦은 날

회재를 넘어서면

철승산 꼭대기

남가섭암 불빛이 나를 반겨줍니다.

 

깜깜할수록 더 밝게

내 마음으로 건너옵니다.

 

등창만 앓아도 십이월 찬 새벽

눈 쌓인 비탈길 쌀 한 말 이고

남가섭암 오르시던 어머니

 

부엉이 울던 달밤

장독대 뒤에

물 한 사발 떠놓고 비시던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이 아들 고희 가까이 무탈하게

시인이 되어

시 잘 씁니다.

 

제사 지내고 고향 떠나며 다시

회재를 올라서면

앞길 비춰주려고 불빛이 앞장섭니다.


2017. 11. 1

문학사랑123(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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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목이 말라 죽고 싶을 때

 

 

그리운 사람은

그리운 채로 그냥 놓아두자.

책갈피에 꽂아놓은 클로버 잎새처럼

푸른빛이 바래지 않게 그냥

추억의 갈피에 끼워만 두자.

봄날 아지랑이 피어올라

쿵쿵 뛰는 심장에 돛이 오를 때

그리운 것들 그립다고

세월 거슬러 불러내지 말자.

낙엽 지는 벤치에 노을 꽃 피어

그리움 목이 말라 죽고 싶을 때에도

눈물 나면 눈물 나는 대로

그리워만 하자.

그리움이

그대의 식탁 위에 오르는 순간

아름다운 날들은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문학사랑 122(2017년 겨울호)

 

 

2017. 10 29

posted by 청라

현충원에서

 

 

현충원에서

 

장미꽃을 꺾어서

비석碑石을 쓸어준다.

 

장미꽃 향기가

비문碑文마다 배어든다.

 

누군가 돌 꽃병에 꽂아두고 간

새빨간 통곡

 

뻐꾸기도 온종일

가슴으로 울다 

시드는 철쭉처럼 지쳐 있구나.

 

어느 산 가시덤불 아래

그대의 피 묻은 철모는 녹이 슬었나.

 

자식이라는 이름도 버리고

남편이라는 이름도 버리고

뱃속에 두고 온 아버지라는 이름도 버리고

 

그대는

나라를 위해 죽었지만

나라는 그대에게

한 뼘의 땅밖에 주지 못했구나.

 

외치고 싶은 말들이

초록의 함성으로 피어나는

묘역에 앉아

 

그대의 슬픔을 닦아주다가

나도 그만 뻐꾸기를 따라

목을 놓는다.

 

2017. 10. 19

대전문학78(2017년 겨울호)

나라사랑문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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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름




내 아내는 이름이 없다.


평로 딸

기창이 부인 

성용 엄마


한국의 주부들에겐

이름이 없다



2017년 9월 23일

posted by 청라

백로 무렵

 

백로 무렵

 

귀뚜라미 노래로

씻고 또 씻어 하얀 이슬

 

백로 무렵부터

나라야

맑은 하늘이거라

posted by 청라

커피숍에서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걸어온 길을 돌아가 본다.

 

커피 향 속에는

그리움이 녹아있다.

 

손잡고 멀리 걸어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서니

참으로 덧없는 세월

 

몇 번씩 우려낸 녹차 맛처럼

우리의 사랑은

밍밍해지고 말았는가.

 

돌아온다는 당신의 말은

내 일기장에 쌓이고 쌓여

낙엽처럼 뒹굴고 있다.

 

처음 만났던 그 커피숍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면

 

기다림도 때로는

행복이 될 수도 있다.

 

 

2017. 9. 1

posted by 청라

낮달

낮달

 

 

너무 밝은 세상이 때로는

절망이 되는 것을 알았다.

 

화장을 지운 민낯으로

넋 놓고 앉아

눈물의 바다에 떠 있었다.

 

, 사랑을 불태우고서

삭정이만 남은 여자야

 

해가 기우는 쪽으로

시간의 추를

좀 더 빠르게 돌려주고 싶었다.

 

 

2017. 8. 18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