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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아버지의 등
노송에 기대어 선다.
든든한 느낌이 아버지의 등 같다.
웃음 속에
늘 고뇌를 감추고
세상의 바람에 힘겨워하면서도
자식들에겐
산처럼 등을 맡기셨던 아버지.
그 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고
세월만큼 허약해진 등을 두드리면서
아이들이 힘들 때
믿음이 되고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서슴없이 기대오는
아버지의 등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의 추위에도 늘 푸르게
젊음을 벼려놓는 소나무처럼
눈물이 절반인 삶의 술잔 속에서도
해맑은 웃음의 알통을 세운다.
2018. 7. 20
『대전문학』81호(2018년 가을호)
글
튤립 사랑
아! 나는 튤립 꽃밭에서
한동안 숨을 멈추었네.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줄기를 위로만 곧게 세워
태양보다 더 뜨겁게 피워 올린
단 한 송이 튤립의 사랑
그래, 사랑은
한 송이만 피우면 되는 거야.
한 삶의 곧은 줄기엔
온 생애를 태워
진액만으로 빚어낸
오직 진실한 한 송이만 피우면 되는 거야.
절규絶叫보다 더 붉은
튤립의 꽃 바다에서
온 몸을 떨고 있었네.
2018. 5. 18
『충청문화예술』2019년 5월호
글
구절초 차를 마시며
움츠리고 있던
구절초 꽃 한 송이
찻잔 속에서 활짝 피어나면
기와집 가득 감싸 안는
가을의 향기
차 한 모금에
나도 향기가 되어
가을비 소리 타고
당신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
아! 수많은 날들 중
가장 빛나는 하루
시월의 앞섶에는
뭉클뭉클 번져가는
오색 빛 함성
2018. 4. 26
『충청예술문화』91호(2019년 10월호)
글
산사에서의 밤
골물소리에 몸을 헹굽니다.
열대야의 꼬리가
조금씩 잘려나갑니다.
속세의 일들 실타래로 엉켜
밤새도록 불면의 바다엔
별들만 섬광閃光처럼 반짝입니다.
무엇을 비는 것일까요.
독경소리 화단 끝에서
봉숭아꽃 한 떨기로 피어납니다.
부처님 눈에 담긴 미소처럼
어둠 속에서도 붉어서 따뜻합니다.
달빛을 뽑아 실을 감으며
목탁소리 한 바가지 머리에 끼얹으면
비누거품처럼
번뇌의 때를 벗겨낼까요.
속 비운 목어처럼 편히 잠들 수 있을까요.
태엽 풀린 시간은 여명을 깨워내도
나는 아무것도 비우지 못했습니다.
2018. 4. 20
『순수문학』2018년 10월호(299호)
글
환한 세상
아침에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위층 처녀가
“안녕하세요.”
나도 기분이 좋아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수고하십니다.”
버스를 타는데 운전기사가
“어서 오세요.”
점심을 먹고 나오며 식당 주인에게
“맛있게 먹었습니다.”
작은 꽃잎이 모여 꽃밭이 되듯
반가운 인사가 모여
환한 세상이 된다.
2018. 4. 19
『충청예술문화89호(2019년 8월호)』
『한글문학』 20호(2020년 가을。겨울호)
글
봄날의 독백
비 그치자
봄꽃들이 한꺼번에 화르르 타올랐다.
계절이 서둘러 가는 산마루에서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결을 들여다본다.
우리들의 사랑은 옛날처럼
순차적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다.
매화가 질 때쯤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질 때쯤 철쭉꽃이 피고
지천으로 널려 폈다
일시에 지고 마는 꽃이 아니라
질릴 때쯤 새 꽃으로
연달아 피어나는 사랑이고 싶다.
2018. 4. 9
『문학사랑』127호(2019년 봄호)
글
은적암 가는 길
절은 산에 깃들고
부처님 눈빛에선
산수리치 냄새가 풍겨야 제 맛이지
지난달 초승에 본
부처님 미소가 너무 상큼해서
몰래 길어놨던 한 모금만 마셔도
비탈길 오르는 발걸음에 날개를 단다.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에는
햇살에도
향내가 난다.
뻐꾸기 소리가 붙잡아서
잠깐 앉았다 가는 바위 위엔
맑은 정적靜寂
산에 취해 길을 잃을 때쯤
목탁소리가 마중 나와서
그래 오늘은 부처님 말씀으로
때 묻은 온 몸 씻고 가야지.
2018. 3. 10
『대전문학』84호(2019년 여름호)
『현대문예』105호(2019년 7,8월호)
글
폭로 공화국
은밀한 것들 모두 끄집어내어
빨랫줄에 걸어놓는 일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사람들 모두 지나가면서
흙 묻은 작대기로 수도 없이 후려치는 일
빛나는 일인지 모르겠다.
지나온 길 되돌아보면
부끄러움 하나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
아름답던 것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일요일 아침
꽃은 피어서 무엇 하나.
2018. 2. 25
글
맹지盲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씩 끊는 일이다.
사방으로 열려있던
사람들 속에서
조금씩 문을 닫아거는 일이다.
어느 날 새벽 바람결에
나는 문득
내 목소리가 혼자라는 걸 느낀다.
무한히 열려있던 세상 속에서
한 군데씩 삐치고 토라지다가
물에 갇힌 섬처럼 내 안에 갇히고 말았다.
아, 타 지번地番의 군중들로 둘러싸여서
나는 그만 맹지盲地가 되고 말았네.
겨울 들 말뚝처럼
적막에 먹히고 말았네.
2018. 2. 10
『대전문학』80호(2018년 여름호)
『시문학』2019년 3월호
글
해우소解憂所에서
들어갈 땐 고해苦海에 찌든
얼굴을 했다가도
해탈한 듯
부처님 얼굴을 하고 나온다.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얼마나 더 눈부신 일이냐.
염불 소리도 하루 몇 번 씩은
해우소解憂所에 와서
살을 뺀다.
배낭에 메고 온
속세의 짐을 모두 버리고
한 줄기 바람으로 돌아가 볼까.
냄새 나는 삶의 찌꺼기들 모두 빠져나간
마음의 뜰에
산의 마음이 새소리로 들어와
잎으로 돋아난다.
2018. 2. 6
『문학사랑』131호(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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