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삼봉

도담삼봉

 

 

신선의 마을이 바로 여기인가.

 

남한강 물새 울음에

세 개의 암봉巖峰

그림같이 떠있고

 

장군봉에 터 잡은

육각 정자엔

한가로운 구름 그림자 걸려있다.

 

흰 두루미 한 마리

물에 잠긴 전설 건져 물고

삼봉 선생을 태우러 가는고.

 

강안江岸에 빈 배 홀로 누워

기다림이

적막으로 멋스럽다.

 

바위에 앉아 넋 놓고

삼봉에 취해있다 보니

해는 어느새 서산에 기울었더라.

 

 

2019. 11. 5

문학사랑130(2019년 겨울호)

대전PEN문학38(20216월호)

 

posted by 청라

나이의 빛깔

 

 

나이는 마음이다.

 

스물이라 생각하면 가슴에서

풀잎의 휘파람 소리가 나다가도

일흔이라 생각하면

은행잎 노란 가을이 내려앉는다.

 

일흔이라도

스물처럼 살자.

언제나 봄의 빛깔로 살아가자.

 

 

2019. 10. 3

시문학581(201912월호)

posted by 청라

슬픔의 법칙

 

사람은 태어나는 날

누구나 다 슬픔도 예약 받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날을 위하여

미리 슬퍼할 필요는 없다.

멀리 떨어진 슬픔을 마중 나가

조급하게 아파하다가

익기도 전에 떨어질 필요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아픔을

미리 아파하지 말자.

아직 오지 않은 슬픔을

미리 슬퍼하지 말자.

오늘의 작은 행복도 가꾸고 즐기면서

남은 햇살에 느긋하게 익어가자.

 

2019. 10. 25

posted by 청라

삼십 년만 함께 가자

 

아내의 오른쪽 뇌가

휑해진 사진을 보고는

입만 떡 벌리고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되지

 

다음날 새벽부터

견과류 찾아 먹이고

오메가 쓰리 먹이고

 

아침식사 후엔

아리셉트, 글라이티린

챙겨주고

 

침대 이불은

아내 쪽 머리 부분

구김이 안 가도록 잘 펴놓는다.

 

아내야!

이대로 삼십 년만 지금같이 가자.

 

잃은 것은

잃은 것대로 그냥 놓아두고

이대로 삼십 년만 지금같이 가자.

 

비오는 저녁에도

아내의 손을 끌고 유등천변을 걸으며

, , 부처님, 십자가 안 가리고

어디나 고갤 숙이는 버릇이 생겼다.

 

 

2019. 10. 19

posted by 청라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싶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구름 끼는 일처럼 무심해진

세월이지만

비오는 날엔 대전역에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별을 하고 싶다.

눈물 보다는 웃음을 더 많이

보여주리.

미워하기보다는 행복을 빌어주면서

그리움으로 가꾸면

이별도 꽃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리.

보내고 돌아서면 온 세상 빗물이 모여

내 가슴 온통 눈물바다가 될 지라도

꽃이 흔들리는 것처럼 손 흔드는

그런 이별을 하고 싶다.

 

2019. 10. 18

시문학581(201912월호)

posted by 청라

대전역에서

 

 

보문산 뻐꾸기 노래처럼

들리다

안 들리다 하는 게 사랑이다.

 

울지 마라.

웃으면서 손 흔들고

돌아서서 눈물 흘리는 게 진짜

충청도 사랑이다.

 

작년 가을에

울면서 떨어지던 잎들도

말간 웃음으로 새롭게 등을 켜지 않느냐.

 

돌아서지 마라

아주 돌아서지만 않는다면

다시 돌아와 부둥켜안는 곳이

대전역이다

 

 

 

2019. 10. 10

대전문학91(2021년 봄호)

 

posted by 청라

권력의 법칙

 

옥양목 하얗게 옷 지어 입어도

세월 흐르면 때가 묻지

조금씩 검어지다가

원래가 검었던 듯 번질거리지.

 

정의로 일어선 권력도

세월 흐르면 때가 묻지

조금씩 더러워지다가

원래의 불의보다 더 뻔뻔해지지.

 

네 얼굴 한 번

맑은 거울에 비춰보아라.

 

비바람 속에서

늘 하얀 옥양목 어디 있으랴

썩지 않는 권력이 어디 있으랴.

 

 

2019. 10. 9

posted by 청라

 

 

높은 곳에 떠 있다고

모두 빛나는 것은 아니다.

 

빛이 난다고

모두의 가슴에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그믐의 어둠 앞에 선 막막한 사람들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하나 둘 깨어나는 별

 

세상이 캄캄할수록

별은 더 많이 반짝인다.

별이 반짝일 때마다

막막했던 가슴마다 한 등씩 불이 켜진다.

 

나는 언제나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위안을 주는

별 같은 사람이 되랴.

 

 

2019. 9. 21

시와 정신72(2020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울며 울며 크는 새

 

처마 밑 제비집에

새 식구가 늘어났다.

동트는 아침부터 줄기차게 운다.

혼자 있어도 울고

어미를 보아도 울고

이 세상 새들 중에

울지 않고 크는 새는 없더라.

울며 울며 견디다 보니

날개가 돋더라.

아픈 삶 이기고 나니

하늘을 날고 있더라.

 

 

2019. 8. 9

 

posted by 청라

둘이라서 다행이다

 

유등천변을 걷다가

두루미끼리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두 마리라서 다행이다.

만일 한 마리만 서 있었다면

들고 있는 한 다리가 얼마나 무거웠을 것인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과

멀리 구름을 이고 있는 산들의 침묵

부리 끝에 걸치고 있는 노을이 얼마나 쓸쓸했을 것인가.

가끔은 내 코고는 소리를

노랫소리 삼아 잠든다는 아내와

아내의 칼도마 소리만 들어도 한없이 편안해지는 나

둘이라서 다행이다.

아침저녁 밥을 같이 먹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내 긴 인생 고개엔 겨울바람만 몰아쳤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사랑한다는 말은 전혀 아낄 일이 아니다.

무심코 넘어오는 큰소리는

상추에 싼 밥처럼 꿀꺽 삼킬 일이다.

저기 산 너머로 황혼이 가까워지는데

남은 길은 꽃밭만 보고 걸어가자.

생각만 해도 웃음 번지는

손잡고 걸어갈 사람 하나 있어서 다행이다.

 

 

2019. 8. 2

충청예술문화90(20199월호)

PEN문학202178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