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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벽파진 함성
아픔에 꺾이지 않는 것들은
모두 함성으로 살아있다.
왜란에 반도가 불타오를 때
열 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
바다 물은 섞이고 흘러갔지만
그들의 피는 올곧게 땅으로 스며들어
황토마을 땅들이 왜 붉은지 아는가.
피에서 피로 전해지는
꽃보다도 붉은 마음
아름다운 것들은 세월의 지우개로
지울 수 없다.
벽파진에 와서 눈을 감으면
파도 소리에도 바람 소리에도
그들의 함성은 천 년을 살아있다.
2019. 7. 27
글
토마토
너무 익어서
미소 한 번 보내면
톡하고 떨어지겠다.
이쁜이처럼
2019. 7. 26
글
나무
나무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서있다.
둥치 감아 올라오는 칡덩굴의 초록빛에
칼날이 번득여도
허리를 굽히는 법이 없다.
꼭대기까지 다 덮어
숨 쉴 공간 하나 없어도
하늘 향해 뻗어 나가던 꿈마저
다 막혀도
나무는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작은 틈으로 바라보면
산은 온통
풀들의 분노를 활활 피워 올린
검붉은 칡꽃 밭
풀들은 공생할 줄을 모른다.
욕심을 한 뼘이라도 더 뻗어
세상의 진액을 남김없이 빨아댈 뿐
온 산을 기세 좋게 휘감은 저 풀들의 반란
산을 지키는 것은 풀이 아니다.
칡덩굴이 무성할수록
산은 황폐해진다.
수만 톤의 무게가 찍어 눌러도
나무야, 절대 허리를 굽히지 말자.
뿌리를 넓고 튼튼하게 벌려
모진 장마가 할퀴고 지나갈 때에
산을 지켜주자.
2019. 7. 6
글
저녁 갈대숲
오늘 하루도
새끼 다섯 마리 모두 안녕하신가.
하루 종일 혹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갈대숲 사이를 헤엄치던 청둥오리
가장 조그마한 한 마리 늦을라치면
한참을 기다리며 조바심하던 어미
오늘 아침 신문기사에
세 살 난 딸을 패 죽였다는 엄마
사람보다 아름다워라
몸은 안 보이고
도란도란 소리만 들려오는 청둥오리네 집에
나팔꽃 연분홍 등 하나 반짝 켜진다.
부리로 털을 골라주며
오늘 하루 위험했던 순간 하나하나 상기시켜 주겠지.
어떻게 살아가야 빛이 나는 지를
정답게 조곤조곤 얘기해주겠지.
집에만 돌아오면 게임에 매달리는 아이들
대화 하나 없이 메마른 우리네 집안
사람보다 아름다워라
밤새도록 소곤거리는 소리 들려오는
청둥오리네 창에
가장 밝은 별 하나도 반짝이며 기웃대고 있다.
2019. 6. 18
글
강가에서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만 달려온
내 얼굴이 비쳐진다.
오르고 또 올라서
나는 무엇으로 피어났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망초 꽃 한 점으로 떠있다.
2019. 6. 8
글
동치미를 무치며
장미꽃이 필 때 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도솔산 뻐꾸기가 초록을 물고 와
소태처럼 쓴 일상日常에
새 잎을 마구 피워 올려도
호박잎모양 후줄근한 삶에 멀미를 느끼며
먼 기억 속
어머니의 손맛을 꺼내듯
해묵은 단지에서 동치미를 꺼낸다.
그리움에 윤을 내듯
골마지를 씻으면
힘들 때마다 문득 찾아오는 당신의 향기
들기름을 치고
고춧가루를 버무리며
저승에서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삶의 입맛을 찾는다.
2019. 5. 21
『충청예술문화』2019년 6월호
글
겨울 송頌
겨울은
내가 채워줄 수 있는
텅 빈 공간이 많아서 좋다.
들판에서 홀로 바람 맞는
허수아비처럼
여기저기 허점이 있고
적당히 쓸쓸하고
수염 자국 거무죽죽한
사나이마냥
그늘이 짙어서 정이 가는
겨울아
온 천지 꽃으로 가득 채운 봄이기보다
여백을 많이 거느린
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우러름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비우다 만 술병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2019. 5. 14
『대전문학』86호(2019년 겨울호)
글
청춘에 고한다
책은
눈물을 지워주는 지우개
많이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글
아픈 손가락
오월은
초록빛 목소리로 온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오면
반짝반짝 빛나는 목소리들이
나를 찾아오지만
진짜 찾고 싶은 이름 하나
자폐증을 앓고 있던 화철이
제 이름도 쓰지 못하고
노래 하나 제대로 부르는 것 없었지만
풀꽃 가슴에 달아주면서
“선생님, 좋아요”
어떤 노래보다 듣기 좋던 노래
세월의 강 너머에서 가시로 찔러
언제나 피 흘리는 아픈 손가락
2019. 5. 7
글
내 고향 가교리
마곡사에서 떠내려 온
염불소리가
마음마다 법당 하나씩 지어주는 곳
눈빛이 풍경소릴 닮은 사람들
웃음 속에 냉이 향이
은은히 풍겨오는 곳
뒷산 뻐꾸기 노래
몸에 배어서
그냥 하는 말 속에도 가락이 흘러
지금도 내 노래의 곧은 줄기는
어릴 때 고향이 귓속말로 넣어준
그 목소리다.
2019. 5. 1
『대전문학』92호(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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