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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가에서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만 달려온
내 얼굴이 비쳐진다.
오르고 또 올라서
나는 무엇으로 피어났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망초 꽃 한 점으로 떠있다.
2019. 6. 8
글
동치미를 무치며
장미꽃이 필 때 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도솔산 뻐꾸기가 초록을 물고 와
소태처럼 쓴 일상日常에
새 잎을 마구 피워 올려도
호박잎모양 후줄근한 삶에 멀미를 느끼며
먼 기억 속
어머니의 손맛을 꺼내듯
해묵은 단지에서 동치미를 꺼낸다.
그리움에 윤을 내듯
골마지를 씻으면
힘들 때마다 문득 찾아오는 당신의 향기
들기름을 치고
고춧가루를 버무리며
저승에서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삶의 입맛을 찾는다.
2019. 5. 21
『충청예술문화』2019년 6월호
글
겨울 송頌
겨울은
내가 채워줄 수 있는
텅 빈 공간이 많아서 좋다.
들판에서 홀로 바람 맞는
허수아비처럼
여기저기 허점이 있고
적당히 쓸쓸하고
수염 자국 거무죽죽한
사나이마냥
그늘이 짙어서 정이 가는
겨울아
온 천지 꽃으로 가득 채운 봄이기보다
여백을 많이 거느린
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우러름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비우다 만 술병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2019. 5. 14
『대전문학』86호(2019년 겨울호)
글
청춘에 고한다
책은
눈물을 지워주는 지우개
많이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글
아픈 손가락
오월은
초록빛 목소리로 온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오면
반짝반짝 빛나는 목소리들이
나를 찾아오지만
진짜 찾고 싶은 이름 하나
자폐증을 앓고 있던 화철이
제 이름도 쓰지 못하고
노래 하나 제대로 부르는 것 없었지만
풀꽃 가슴에 달아주면서
“선생님, 좋아요”
어떤 노래보다 듣기 좋던 노래
세월의 강 너머에서 가시로 찔러
언제나 피 흘리는 아픈 손가락
2019. 5. 7
글
내 고향 가교리
마곡사에서 떠내려 온
염불소리가
마음마다 법당 하나씩 지어주는 곳
눈빛이 풍경소릴 닮은 사람들
웃음 속에 냉이 향이
은은히 풍겨오는 곳
뒷산 뻐꾸기 노래
몸에 배어서
그냥 하는 말 속에도 가락이 흘러
지금도 내 노래의 곧은 줄기는
어릴 때 고향이 귓속말로 넣어준
그 목소리다.
2019. 5. 1
『대전문학』92호(2021년 여름호)
글
꽃이 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
삼월이 오면 우리가 할 일은
비둘기 맨발에
꽃신을 신겨주는 일이다.
얼마나 추운 것들이
많은 세상이냐.
우리가 봄 햇살 같이 다가가
꽁꽁 언 가슴마다
불씨 하나 지펴준다면
그리하여
빙산처럼 단단한 슬픔에
금 하나라도 가게 할 수 있다면
아! 눈물 맑은 노래들이 피어올라서
이 세상을 데워주겠지.
주위를 돌아보며 사는 일들은
꽃이 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
2019. 3. 16
『시문학』581호(2019년 12월호)
『충청예술문화』94호(2020년 1월호)
글
제비꽃에게
콘크리트 사이에
뾰족이 고갤 쳐든 제비꽃아
괜찮다. 괜찮다.
목련꽃처럼 우아하지 않으면 어떠리.
겨우내 툰드라의 뜰에서
옹송그리고 지내다가
봄 오자 단단한 벽을 허물고 깃발 세운
네 눈빛만으로 골목이 환하지 않느냐.
괜찮다. 괜찮다.
어린 아이들아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떠리.
까르르 까르르
너희들의 웃음만으로도
온 세상이 환하지 않느냐.
2019. 2. 28
『충청예술문화』2019년 4월호
『한글문학』 20호(2020년 가을。겨울호)
글
눈 오는 날
술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해야겠다.
따뜻한 정종 몇 잔 함께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대전의 밤거리를 걸어야겠다.
서먹했던 마음의 골목
밝게 비추는 불빛
수만의 벌떼처럼 잉잉대는 눈발
고희古稀의 문턱인데
명리名利를 다퉈 무엇 하리.
묵은 둥치일수록
단단하게 붙어있는
잔나비걸상버섯처럼
겨울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가자고
손을 내밀어야겠다.
2019, 2, 2
『충청예술문화』2019년 3월호
글
사막을 일구다
사랑편지를 전했더니
사막을 보내왔다.
그녀의 답신答信은 사막의 달빛처럼
무채색이다.
내 사랑 어디 씨앗 하나 싹틔울 곳 없어
도마뱀처럼 납작 엎드려
기어도 기어도 꽃은 피지 않는다.
선인장 가시에 긁힌 바람만 몇 올
모래언덕을 헤집다 스러질 뿐.
사랑이여!
작은 생명 하나 움트지 못할
불모의 땅에 뿌리를 내려보자.
깊이 숨어있는 초록의 숨결을 모아
천둥 번개를 불러오겠다.
바삭거리는 당신의 가슴에
몇 천 번이라도 비를 퍼붓겠다.
나는 사막을 일궈
사랑 한 그루 푸르게 크게 하겠다.
2019. 1. 8
『충청예술문화』92호(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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