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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금동관음보살입상
백제의 미소는 황홀하다.
금동관음보살입상 앞에 서면
온갖 근심 씻겨 나가고
팔 엽 연화대좌 위에 삼보 관
탄력적 몸에서 봄바람 같은 말씀
흘러나올 듯도 하다.
통통한 두 뺨에 둥근 얼굴
백제사람 모습으로 현신現身했구나.
천 년을 지나도 변치 않는
자비로운 얼굴
보고 있으면
삶의 독한 매듭도 술술
풀릴 것만 같다.
2018. 1. 30
글
백제 금동대향로
향불은 꺼져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 상 앞뒤
백제로 통하는 다섯 개의 구멍은 막혀있고,
활짝 피어난 연꽃 봉오리 표면에는
불사조와 사슴, 그리고 학
낯선 전등불 아래 쭈볏거리고 서있다.
용과 봉황이 음양으로 갈라서서
연꽃을 피워내어 봉래산을 받쳐 들고
스물 세 개의 중첩된 산골짜기로
계곡물처럼 속삭이며 흐르던
피리, 소비파, 현금, 북소리 멈춰있다.
역사는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일 뿐이런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올 줄 모르지만
향로에 향불 피어오르면
봉황이 여의주를 품고 하늘로 날아오르듯
찬란한 백제가 다시 열릴 것만 같다.
2018. 1. 27
글
환향녀
소녀가 눈보라 속에 앉아 있다.
청동의 어깨 위에 쌓이는 겨울,
그녀의 삶은 늘 바람 부는 날이었다.
풀 수 없는 옷고름 안쪽에
부끄럼처럼 감춰졌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짐승 같은 울음
그녀의 오열嗚咽 속에는 늘 열대의 태양이
핏덩이처럼 거꾸로 떨어지고 있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 꿇고 내버린 건
정조貞操였다.
여인들의 절망이 까마귀처럼 날아올랐다.
행복은 호국胡國의 삭풍 속에서 이슬처럼 깨어지고
필리핀 열대우림 지옥에서 돌아왔지만
나는 돌아올 곳이 없었다.
나는 환향녀요, 위안부였다.
가랑잎을 덮은 꿩처럼 몸을 숨겨도
언제나 겨눠지는 손가락 칼날
화냥년 화냥년 화냥년
나를 버린 건 아버지였다. 남자였다.
그리고 조국이었다.
저희들이 살기위해 나를 버리고
삭정이처럼 마른 내 몸에 멸시의 화살을 쏘고 있느냐.
부끄럽지 않은 자 와서 돌로 쳐라.
세상은 눈으로 지워져 적막하고 모든 길들은 막혀있다.
꽃을 놓고 가는 아이도 눈물을 주고 가는 노인도
힘없는 정의보다는 거룩하다.
살아서는 아버지의 딸도 아니고, 조국의 딸도 아니고
그냥 더러운 몸뚱이었던 것을
동상으로 앉혀준 것이 정말 나를 위해서이냐.
파헤칠수록 더욱 붉어지는 상처를 보며
옛날에도 지금도 그냥 조신한 여자이고 싶다.
『시문학』2018년 3월호
『문학사랑』130호(2019년 겨울호)
글
새해의 기원
무술년戊戌年 첫 새벽에 풍등風燈 하나 띄웁니다.
어둠을 뚫어내며 하늘로 올라갑니다.
부상扶桑까지 날아가서
밝고 뜨거운 태양을 불러오십시오.
이 땅의 겨울을
따뜻하게 녹여주십시오.
정유년丁酉年 한 해는 너무도 추웠습니다.
북녘 땅에서 연이어 미사일이 날아가고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폭탄이 덩치를 불렸습니다.
대륙은 사드를 핑계삼아
정치 경제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바다건너에선 이 땅을
전쟁터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우리끼리라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촛불과 태극기가 서로 높이를 겨루고
세월호의 망령은 창으로 아직도 민족의 가슴을 찌릅니다.
대통령은 탄핵을 당해 어둠 속에 갇히고
겨레의 결속은
갈가리 찢겨졌습니다.
사랑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증오를 부풀려서 빚은 나라입니다.
각 부처部處에는 전문가보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공신功臣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에
신명身命을 바쳐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는 과거를 단죄하느라 진을 빼기보다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차례입니다.
억새들도 서로의 등을 지키는 것이
혼자 바람을 견디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미움보다는 용서와 사랑으로 뭉쳐서
어깨동무하고 바람을 헤쳐갑시다.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는
무술년 이른 새벽에 풍등을 띄우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노니
희망 잃은 대한민국에 날개를 주셔서
금빛 날개로 온 하늘을 덮게 하소서.
2018년 1월 1일
『충청문화예술 2018년 1월호』
글
겨울 허수아비
빈들에
바람의 살 내음이 가득하다.
하루의 일 다 마치고 황혼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 같은 허수아비.
나는 겨울 녘 들풀들의 신음마저
사랑한다.
박제로 남아있는 풀벌레소리들의
침묵도 사랑한다.
황금빛 가을에 이루어야 할 삶의 과제들
모두 마치고
부스러져야 할 땐 부스러지는
저 당당한 퇴임退任
눈부신 정적靜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먼 산사 범종소리 들을 깨우면.
수만 개의 번뇌처럼 반짝이는 눈발
눈발 속으로 다 벗은 채
지워지는 허수아비
2017. 12. 17
『시문학』2018년 3월호
『대전문학』82호(2018년 겨울호)
글
달빛 기도
마곡사 부처님께
백팔 배百八拜 하고 돌아온 저녁
부처님 입가에 피었던 미소
초승달로 따라왔네.
그대 빗장 지른 가슴에
달빛 한 가닥 스치거든
마음의 문 살짝 열어달라는
달빛 기도인 줄 아소서.
2017. 11. 29
『대전문학』79호(2018년 봄호)
글
눈 오는 날에
하늘에 올라갔으면
구름이 되어 떠돌 것이지.
하얀 솜털처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허리 굽혀 내려오는가.
이제 기쁨의 노래가 되어
가장 낮은 곳을 흐를 것이다.
기가 부족해 황달로 삭아드는
나무의 뿌리에 온기를 전해주고
봉오리 터뜨리기에는 뒷심이 딸리는
풀꽃의 줄기에 숨결을 보탤 것이다.
겨울이 시들어 강산에 추위 풀리면
네 겸손한 하강下降으로 인해
온 천지에 푸른 새싹 돋아나고
꽃들 세상 밝히는 등을 켜들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 머물러 양광陽光을 가리는
검은 구름으로 살기보다는
가장 낮은 곳을 흐르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웃음이 되고, 온기가 되고
말씀이 되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가장 좋은 삶은 물과 같다는 말을 알 듯도 하다.
2017. 11. 24
『시문학』2018년 3월호
글
억새
억새는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지를 안다.
외딴 산기슭 홀로 서 있을 때는
진한 울음이던 것이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모여서 아픈 살 비벼주니
얼마나 흥겨운 노랫소리냐.
깜깜한 밤에도 억새는 콧노래 흥얼거린다.
바람이 없어도 삶을 춤추게 하는 것
그것이 서로의 눈빛임을 안다.
『시문학』2018년 3월호
글
사람의 향기 - 아름답게 살다 간 김영우 시인을 추모하며
꽃처럼 산 사람 지고 나서도 꽃
세상을 맑게 씻어주는 사람의 향기여 |
『문학사랑』126호(2018년 겨울호)
글
산책길에서
아침 길에서 만나면
반가운 사람이 있고
인사를 해도
안 만나는 것만
못한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침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환한 꽃을 달아줄 수 있을까.
잎이 유난히 더 곱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서
산골 물 같은 하늘에 헹궈
웃음 한 조각
반짝반짝 닦아본다.
2017. 11. 7
『시문학』201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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