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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동무 소나무
나이테를 얼마나 헤집어야만
어머니 꾸중소리 거기 있을까
고희 가까운 날
문득 그 나이테 언저리 그리워져
고향 집엘 찾아갔다.
와락 껴안아도 말 한 마디 없는
웃음마저 아주 드문
무심한 놈
그래도 벼랑 끝에 서서
밀려오는 세상의 파도에 출렁거릴 때
제일 먼저 손을 잡아주던 친구
꾸중하는 사람 하나 없어
매운 꾸중 소리 더욱 그리운 날
솔가지 회초리 마음으로 끌어안으면
네 스스로 꾸짖으라고
부끄럽게 살지 말라고
한결같은 초록으로 말하고 있다.
2018. 12. 1
『대전문학』83호(2019년 봄호)
글
여승
여승은
남탕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사내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여승은 합장했다.
불법에 몸을 담근 승려에게는
남자냐 여자냐는 의미가 없습니다.
남자들의 대가리가
힘차게 꺼떡거렸다.
남자란 저렇게 생긴 거구나
여승은 가을 달밤 귀뚜리 울 때
콩콩 뛰던
설렘 하나 또 씻어냈다.
문에 다다른 여승의 이마에
백호白毫가 돋아났다.
2018. 11. 20
글
촛불 세상
촛불은
열 개만 모여도
신문, 방송에 활화산 터진 것 같다.
태극기는
만 개가 모여도
가물치 콧구멍이다.
국경일에
태극기 대신
촛불을 달아야 하나?
2018. 11. 13
글
은행잎의 노래
누군가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니
은행잎만 샛노랗게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은행잎엔 사랑이 있다.
새 잎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한 잎이 몸을 던지면
또 한 잎이 몸을 던지고
온 우주 가득
노란 치마 활짝 펴고 떨어지는 삼천궁녀들
뒷사람을 위해서 깨끗이 물러나는 일은
꽃이 피는 일보다 아름다워라.
누군가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니
사라짐의 날개로 세상을 덮으려는 듯
은행잎만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다.
2018. 11. 10
글
부석사浮石寺 가을
잘 익어 울긋불긋
부처님 말씀
귀 열면 서해바다
피안彼岸이 코앞
향내 묻은 목탁소리에
씻고 또 씻어
다 벗은 벚나무처럼
말갛게 섰네.
2018. 11. 3
『문학사랑』126호(2018년 겨울호)
글
가을 길
봄, 여름 아름답게 걸어온 사람은
쑥부쟁이 꽃 모여서
피어있는 의미를 안다.
연보랏빛 기다림이
불 밝히고 있으니 가을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반짝반짝 빛나니 가을이다.
사랑도 함빡 익으면 결국은
떨어지는 것을
끝나지 않는 잔치 어디 있으랴.
나뭇잎들 색색으로 물들어
결별訣別을 준비하는 가을 길을 걸으면
기다림도 때로는 행복임을 안다.
2018. 10. 23
『대전문학』85호(2019년 가을호)
글
깨진 아리랑
늙은 가수 소프라노로
아리랑을 부르네.
호흡은 가빠져
박자는 이가 빠지고
높은 소리 갈라져
깨진 아리랑
깨어져 막걸리처럼
맛난 아리랑
2018. 10. 12
글
산길
산길을 오르는 것은
산에 물들어가기 위해서다.
산으로 녹아들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몸으로 산이 되기 위해서다.
조그만 풀꽃으로 피면 어떠리.
초록빛으로 같이 물들다가
새들의 노래를 모아
자줏빛 내밀한 속말 한 송이로
서있으면 좋겠네.
솔잎 스쳐온 바람이
미움을 벗겨가고
꽃향기 다가와 욕심을 벗겨가고
말갛게 벗고 벗어
투명해져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어떠리.
내가 정상을 향해 산길을
끝없이 올라가는 것은
모든 것을 발아래 두려는 것이 아니다.
품어 안고 섬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2018. 9. 4
『문예운동』142호(2019년 여름호)
『현대문예』105호(2019년 7,8월호)
글
개화開花
꽃필 때
꽃빛에
아침노을 마실 왔다.
시작은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2018. 8. 28
글
둘이 먹는 밥
달도 덩그렇게 혼자 떠 있을 때는
죽고 싶도록 외로운 것이다.
하나 둘씩 별이 눈뜨고
온 하늘이 별들의 속삭임으로
수런거릴 때
달의 미소가 더 따뜻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들끓는 식당 안에서
식판을 들고 와 혼자 밥을 먹을 때
아무도 앞자리에 마주앉는 이 없는 사람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손잡고 같이 걸을 때
삶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아내여!
아침저녁 식탁에
나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다.
내 옆에서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당신의 호흡이 느껴질 때
나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낀다.
자식들이 하나씩 제 둥지로 흩어져가고
어깨동무했던 친구들
남처럼 서먹해졌을 때
돌아서지 않고 언제나 내 옆 자리를 지켜준
밥을 같이 먹어준 아내여!
세월의 눈금이 눈보라처럼 거셀지라도
당신의 미소는
늘 솔빛처럼 싱싱해야 한다.
내 옆 자리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어야 한다.
2018. 7. 27
『문학사랑』 2018년 가을호(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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