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이팝나무에

아이들 얼굴이 조롱조롱 피어난다.

 

그 사람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그리워할 이름 많아서 좋다.

 

아이스크림 한번만 돌려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하던 아이들

 

체육대회에서 꼴찌를 해도

미친 듯이 응원하던

그 흥은 아직 남았을까.

 

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미워할 사람이 많은 것보다

얼마나 고마운 삶인가.

 

날마다 드리는

간절한 나의 기도가

제자들의 앞길을

꽃길로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이팝 꽃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들을 향해

뻐꾸기 노래로 박수를 보낸다.

 

 

2020. 5. 15

posted by 청라

연꽃 같은 사람

                     장덕천 시인을 보며

 

 

당신은

새벽을 열고 피어난

연꽃 같은 사람

 

도시의 아픔은

그대 널따란 잎새에 앉았다가

아침 이슬로 걸러져

대청호 물빛이 되고

 

연향에 취해있던 호수의 바람은

향기의 지우개로

온 세상 그늘을 지워주러 간다.

 

영혼이 너무 따뜻해서

삶의 꽃술 하나하나가

시처럼 아름다운 사람

 

오늘도 대청호는

그대 한 송이 피어있어서

찰싹이는 물결소리에서도

향내가 난다.

 

 

2020. 6. 11

문학사랑133(2020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장미 빛깔의 말

 

 

무슨 꽃이냐고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묻지만

 

환하게 웃으면서

장미꽃이라 대답합니다.

 

백 번 천 번을 물어도

지워진 백지에

다시 도장이 찍힐 때까지

 

장미 빛깔의 말로

대답할래요.

 

“사랑”이라고

 

 

2020. 5. 30

시문학2020년 8월호

posted by 청라

둑길에서

둑길에서

 

 

반듯하게 걷지 않아도 좋다.

 

삶의 굽이만큼

구부러진 꼬부랑길

 

민들레꽃이 피었으면

한참을 쪼그려 앉아

함께 이야기하다 가도 좋고

 

풀벌레 노랫소리 들리면

나무로 서서 듣고 있다가

나비처럼 팔랑거려도 좋다.

 

달리지 않아도

재촉하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둑길에 모여 있다.

 

2020. 5. 21

posted by 청라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시/제7시집 2020. 5. 17. 10:09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지난 생일에 내가 사준

진주 반지의 영롱한 빛깔도 흐려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여섯 살 손자의 이름도 낯설어지고

가끔은 정말로 잊고 싶지 않아서

자다 말고 문득 일어나 내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내의 저 간절한 주문呪文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시문학2020년 8월호

 

posted by 청라

비밀

비밀

 

 

보고 싶다는 말을 삼키는 것이

만남보다 큰 기쁨일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감추는 것이

사랑보다 큰 행복일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에게 보낼 편지를

밤마다 적어놓고서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놓습니다.

 

당신을 생각만 해도

내 마음 양 볼엔

복사꽃이 피지만

 

혼자만 가슴 속에 사랑을 키우는 것은

몰래 사랑하는 것이

드러난 사랑보다 더 달콤한 까닭입니다.

 

비밀 하나 갖는 것이

설렘일 줄은

이제야 알았습니다.

 

 

2020. 5. 5

 

posted by 청라

안부

안부

 

 

시 몇 달 못 보면

죽었나?”

 

또랑또랑 눈 뜬

시 한 편 보면

 

, 살았네.”

 

 

2020. 5. 1

posted by 청라

들꽃

들꽃

 

 

나 들꽃이라 무시하지 마라.

 

못난 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외면할 때도

 

나는

거친 땅에서 싹을 틔워

어두운 들을 밝힐 꽃대를 세운다.

 

폭풍이 불어

모든 꽃들 다 누워 일어서지 못할 때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불의不義에 맞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일어선다.

 

밟을수록

더욱 끈질기게 일어나

꺾여진 옆구리에서 꽃을 피운다.

 

꽃을 피워

어두운 세상 환하게 덮는다.

 

 

2020. 4. 19

문학사랑132(2020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강가에서

강가에서

 

 

저 물 흐르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더 자연스럽게

 

막히면 돌아가고

둑이 있으면

채우고 또 채워 넘어가는

 

강가에 서 있으면

세상 살아가는 바른 도리가

보일 듯도 하다.

 

작은 미움에도 갈기를 세워

분노의 물거품 일으키며

때로는 폭포로 떨어지던

산골 물소리 같은 젊음을 흘려보내고

 

이제는 하늘도 산도 가슴에 품고

, 작은 잠자리 그림자

풀꽃들의 향기도 품으며

 

바람이 속삭이다 가는

시간의 어느 굽이를

어쩌다 이만큼 흘러왔는가.

 

바다가 보이는 삶의 하류에서

미운 것도 예쁜 것도 섞여서 잔잔해지는

깨어지지 않을 평화를 보았네.

 

 

2020. 4. 17

대전문학88(2020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향기 있는 사람끼리

마음 비비며

저런 빛깔로

사랑했으면 좋겠네.

 

피어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저런 말씀으로

살았으면 좋겠네.

 

 

2020. 4. 8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