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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해당되는 글 523건
- 2020.05.21 둑길에서
- 2020.05.17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 2020.05.05 비밀
- 2020.05.01 안부
- 2020.04.19 들꽃
- 2020.04.17 강가에서
- 2020.04.08 꽃
- 2020.04.08 백마강 물새 울음
- 2020.03.18 반쯤 핀 동백 같이 - 문덕수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 2020.02.14 섬
글
둑길에서
반듯하게 걷지 않아도 좋다.
삶의 굽이만큼
구부러진 꼬부랑길
민들레꽃이 피었으면
한참을 쪼그려 앉아
함께 이야기하다 가도 좋고
풀벌레 노랫소리 들리면
나무로 서서 듣고 있다가
나비처럼 팔랑거려도 좋다.
달리지 않아도
재촉하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둑길에 모여 있다.
2020. 5. 21
글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지난 생일에 내가 사준
진주 반지의 영롱한 빛깔도 흐려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여섯 살 손자의 이름도 낯설어지고
가끔은 정말로 잊고 싶지 않아서
자다 말고 문득 일어나 내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내의 저 간절한 주문呪文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시문학』2020년 8월호
글
비밀
보고 싶다는 말을 삼키는 것이
만남보다 큰 기쁨일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감추는 것이
사랑보다 큰 행복일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에게 보낼 편지를
밤마다 적어놓고서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놓습니다.
당신을 생각만 해도
내 마음 양 볼엔
복사꽃이 피지만
혼자만 가슴 속에 사랑을 키우는 것은
몰래 사랑하는 것이
드러난 사랑보다 더 달콤한 까닭입니다.
비밀 하나 갖는 것이
설렘일 줄은
이제야 알았습니다.
2020. 5. 5
글
안부
시 몇 달 못 보면
“죽었나?”
또랑또랑 눈 뜬
시 한 편 보면
“음, 살았네.”
2020. 5. 1
글
들꽃
나 들꽃이라 무시하지 마라.
못난 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외면할 때도
나는
거친 땅에서 싹을 틔워
어두운 들을 밝힐 꽃대를 세운다.
폭풍이 불어
모든 꽃들 다 누워 일어서지 못할 때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불의不義에 맞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일어선다.
밟을수록
더욱 끈질기게 일어나
꺾여진 옆구리에서 꽃을 피운다.
꽃을 피워
어두운 세상 환하게 덮는다.
2020. 4. 19
『문학사랑』132호(2020년 여름호)
글
강가에서
저 물 흐르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더 자연스럽게
막히면 돌아가고
둑이 있으면
채우고 또 채워 넘어가는
강가에 서 있으면
세상 살아가는 바른 도리가
보일 듯도 하다.
작은 미움에도 갈기를 세워
분노의 물거품 일으키며
때로는 폭포로 떨어지던
산골 물소리 같은 젊음을 흘려보내고
이제는 하늘도 산도 가슴에 품고
아, 작은 잠자리 그림자
풀꽃들의 향기도 품으며
바람이 속삭이다 가는
시간의 어느 굽이를
어쩌다 이만큼 흘러왔는가.
바다가 보이는 삶의 하류에서
미운 것도 예쁜 것도 섞여서 잔잔해지는
깨어지지 않을 평화를 보았네.
2020. 4. 17
『대전문학』88호(2020년 여름호)
글
꽃
향기 있는 사람끼리
마음 비비며
저런 빛깔로
사랑했으면 좋겠네.
피어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저런 말씀으로
살았으면 좋겠네.
2020. 4. 8
글
백마강 물새 울음
백마강 물새들은 아직도
백제 말로 운다.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궁궐터에 가서
연화문蓮花紋 기와를 쪼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백마강으로 와서
고란사 종소리와 화답和答한다.
백마강 물새 울음엔
피를 통해 전해지는
향기 같은 게 있다.
하오下午의 물그림자가 담고 있는
풀꽃들의 춤
듣고 있으면 어깨부터 출렁이는
신기神氣 같은 게 있다.
2020. 4. 8
『시와 정신』72호(2020년 여름호)
글
반쯤 핀 동백 같이
문덕수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웃다가
잠깐 흔들리다가
반쯤 핀 동백 같이
사진 속에 있네.
당신의 생애는 햇빛 달빛에
익을수록
신화가 되어 가는데
이승의 것들은
이승의 마을에 남겨둔 채
훌훌 턴 바람처럼
웃고 있네.
마중 나온 봄 향기에도
눈물 나는데
반쯤 핀 동백 같이 웃고 있네.
2020. 3. 16
『시문학』586호(2020년 5월호)
글
섬
봄비 그치면
둑길 위에 섬 하나 지어놓고
그 섬에 갇혀보자,
민들레 꽃대 위에
그대 얼굴 피워놓고
때로는 함께 걷는 일보다
혼자 그리워하는 일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자.
그 섬에는
눈물 같은 것은 살게 하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의
눈웃음 같은
따뜻한 것들만 가득 살게 하자.
202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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