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古寺에서

 

 

사랑은 저 대웅전 단청처럼

목탁소리 쌓여서

바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염불하는 저 노승의 얼굴처럼

풍경소리에 쓸린다고

자글자글 주름만 파여지는 것이 아니다.

 

옅어지며 법당의 향내가 묻어

더욱 익숙해지고 정이 가는 것

갈피마다 세월이 익어

더욱 깊어지는 것

 

소나무 길로 둘이 손잡고 걸어가면

넘어가는 노을도

지나온 발자국을 식지 않게 덮어주는 것

 

문학사랑137(2021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그리움은

그리운 채로 그냥 남겨두자.

밤하늘 별들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멀리서 서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볼 수 없어 신비로움이 살아있기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사랑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만나자는 말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만나서 그리움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마음속의 보석 하나를 잃는 것이다. 

 

2021. 1. 30

 

 

posted by 청라

 

수련睡蓮피는 아침

 

 

당신의 웃음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당신의 향기는

물속에서도 씻겨가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장 낮은 쪽에서

수줍은 미소로 피어

 

생우유 빛 살결과

밀어가 녹아있는 불타는 꽃술

 

! 당신은

한 번 빨려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저 늪 같은 사람.

 

 

2021. 1. 20

문학사랑136(2021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나릿골 사랑

나릿골 사랑

 

 

아직 사랑하는 사람 만나지 못했으면

나릿골 감성마을

비탈진 언덕길 올라가 보아라.

골목이 끝나는 마지막 집에

요것조것 다 따지는 요즘 식 사랑 아니라

첫눈에 반하면 와락 안겨오는 옛날 식 사랑

한 사람 만날지 모르지.

러브레터로 떠오르는 달을 몰고 들어가

갈매기 목청을 빌려 진한 고백 한번 해 보아라.

해풍에 씻기고 씻긴 솔빛 사랑을

그 사람 가슴에 깊이깊이 심어놓아라.

촌스러워 더 정이 가는 알록달록한 지붕 아래

마지막 배가 들어오고

방파제 그늘 속으로 하루가 접히면

고단함도 때로는 낭만이 되기도 하지

소주 한 잔에 안주는 짭조름한 파돗소리

노래는 주인이 부르고

손님은 바다에 취하고

천 년을 해풍에 익은 해송의 춤 자락에 묻어

밤 내 사랑을 익히고 익히어라.

여명이 밝아오면 해당화로 피게

가슴을 들썩여 불을 지피거라.

실직국悉直國  사람들은 눈 감아도 알지.

순박한 눈빛에서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걸

새벽으로 해를 씻어 안고 내려오는

정다운 계단마다

햇살처럼 고이는 헌화가獻花歌 가락

 

 

2020. 12. 27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

찔레꽃 피던 날

 

 

찔레싱아 꺾어 먹다

소쩍새 소리에 더 허기져서

삶은 보리쌀 소쿠리로 달려가

반 수저씩 맛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밥보자기 치워놓고

정신없이 퍼먹다 보니

밥 소쿠리 텅 비었네.

서녘 산 그림자 성큼성큼 내려올 때

일 나갔던 아버지 무서워

덤불 뒤에 숨어 보던

창백한 낮달 같은 얼굴 

하얀 찔레꽃.

posted by 청라

어머니라는 이름

 

 

세상에 제일 아름다운 이름은

어머니다.

 

쪽진 머리

아주까리기름 발라서 곱게 빗고

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리가 백목련 같던

어머니다.

 

찔레꽃 필 무렵 보릿고개에

식구들 모두 점심을 굶을 때에도

책보를 펼쳐보면 보리누룽지

몰래 숨겨 싸주신

어머니다.

 

자식의 앞길을 빌어준다고

찬 서리 내리는 가을 달밤에

장독대 앞에서 손 모아 빌고 있다가

하루 종일 콜록대던

어머니다.

 

타향에서 서러운 일을 당할 때마다

고향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을 때마다

된장찌개 냄새처럼 제일 먼저 떠오르던

 

어머니, 어머니

부를수록 그리워지는

세상에서 제일 향기로운 이름이 바로

어머니다.

 

 

2020. 12. 4

 

posted by 청라

삼척에 가면

삼척에 가면

 

 

바다의 탁본拓本을 뜨러

삼척엘 갔네.

그믐밤의 어둠을 짙게 칠했다가

초하루 아침의 맑은 햇살로 벗겨내면

파도의 싱싱한 근육들과 갈매기 소리,

삼척 사람들 다정한 미소가

해국海菊으로 피어있네.

태백을 넘어올 때 서둘러

손 흔들던 가을이

죽서루와 어깨동무로

빨갛게 타고 있는 곳

찍혀 나온 바다엔

좋아하면 모두 다 주는

삼척 사나이의 막걸리 맛 웃음소리가

산호초 사이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네.

 

2020. 10. 27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

 

 

꽃 지는 날 있으면

꽃 피는 날 오고

 

눈물 이운 자리에는

환한 웃음이 핀다.

 

그대여, 오늘 막막하다고

아주 쓰러지진 말게나.

 

삶은 늘 출렁이는

파도 같은 것

 

 

2020. 9. 21

posted by 청라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때 아름답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두 잔의 커피를 시켜놓고

홀로 커피를 마신다.

외로움이 커피 향으로 묻어난다.

창밖 먼 바다엔 어디로 가는지

배 한 척 멀어지고

유리창에

갈매기 소리들이 부딪혀 떨어진다.

이별을 말하던 날 빛나던 해당화는

다홍빛이 아직 다 바래지 않았는데

나는 왜 노을 지는 저녁이면 여기에 와서

쓸쓸히 바다에 취해있는가.

주인 없는 찻잔을 바라보며

긴 한숨 내뱉으면

그리움은 사랑보다도 달콤하다.

 

 

2020. 9. 11

문학사랑134(2020년 겨울호)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

죽서루의 달

죽서루의 달

 

 

동해에서 막 건져 올린 달이

겹처마 맞배지붕에 앉아 있다

 

죽서루 달빛에서는

천 년의 이끼 같은 향기가 난다.

 

삼척 사람들

오래 가는 사랑처럼

 

파도 소리에 삭히고 삭혀

만삭으로 익은 달

 

오십 여울 돌아 달려온 태백산 물도

죽서루 달빛에 취해

밤새도록 절벽을 오르고 있다.

 

 

2020. 8. 26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