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산 휴양림             

 

                    

반듯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와서

메타세콰이어 숲을 보면 알지

 

줄지어 도란도란 살아가는 것도

하늘만 보고

굽힘없이 살아가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스카이웨이 올라

출렁다리에서 몸을 흔들어 사념을 털고

녹음에 묻혀 세상을 보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근심 있는 사람들 와서

장태산 맑은 바람에 근심을 씻게.

비단처럼 고와진 마음의 결에

새 소리 별처럼 총총 심어가면

 

어제까지 등돌리던 사람에게도

웃는 얼굴로

살며시 손을 내밀게 되리.

 

 

2020년 8월

e-백문학3(2020)

 

 

posted by 청라

일식日蝕

일식日蝕

 

 

아이들 웃음소리

가득하던 운동장에

반달만큼 모인

아이들

 

느티나무에 앉은 까치들이

아이들과

수 싸움을 하고 있다.

 

달그림자 해를 가리면서

어둑해진 시골 학교

 

육십 년 만에 찾아왔더니

내년엔

폐교한단다.

 

 

2020. 8. 3

posted by 청라

갈대와 나팔꽃

 

 

한 길 넘게 자란 갈대를 감아 올라가

나팔꽃이 방끗 피었습니다.

갈대는 압니다.

저 환한 웃음이

나팔꽃의 미안한 마음이라는 걸

갈대는 잎을 내밀어

나팔꽃이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바람이 붑니다.

모든 갈대들 휘청거릴 때

나팔꽃은 살며시 갈대를 안아줍니다.

흘러가는 물은 알까요.

아주 작은 것끼리도 서로 손을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2020. 7. 5

고마문학창간호(2020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설렘 등에 불 하나 켜는 것이다.

꽃잎 떨어지는 것도, 낙엽이 뒹구는 것도,

! 무심히 눈 내리는 것마저 왜 이리 가슴

떨리게 하는 것이냐.

내 안에 너를 그려 넣는 붓질 한 번에

무채색 내 인생이

환희歡喜 꽃밭으로 환하게 타오르는 것이 아니냐.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 하나 뜨는 것이다.

 

 

2020. 7. 4

고마문학창간호(2020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유성온천

 

 

나그네여

그대 삶의 발걸음 하루만 여기 멈추게.

오십 도가 넘는 라듐 온천에

때처럼 찌든 삶의 피로를 씻어내고

조금 남은 근심의 찌꺼기는

만년교 아래로 던져 버리게.

여기는

시생대 말기부터 지구의 심장에서 분출하던

뜨거운 피로

마음의 상처마저 치료해주던 곳

맛 집을 찾아 점심을 먹고

이팝꽃 마중 나온 거리

한 바퀴 돌고 와서 족욕足浴을 하면

그대의 인생 십 년은 젊어지리.

끓어오르는 알칼리성 열탕에서

섭섭함을 모두 풀어버리게.

사랑하는 사람과 밤새 정을 나누면

영원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리.

 

 

2020. 7. 3

e-백문학3(2020)

posted by 청라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2

 

  세상이 부르면 문이 없어도 나와야 한다. 네그루의 옛 솔과 옛 잣나무, 작은 집 하나, 선비는 적막으로 몸을 닦고 있다. 찾는 이 없어 눈길은 깨끗하다. 세상이 당신을 버릴 때에 당신도 세상을 버렸지만 둥근 창으로 넘어오는 바람 같은 소문, 세상은 갈등으로 타오르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뒤바뀌어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선비는 귀를 막고 있다. 몇 겹의 창호지로 막아도 끊임없이 울려오는 천둥 같은 소리. 입으로 정의를 앞세우는 자는 불의로 망하리라. 세상은 먹장구름으로 덮여있다. 양심 있는 사람은 입을 열지 않고, 부자들은 돈을 쓰지 않고, 아이들은 더 이상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세상이 너무 캄캄해서 씨를 뿌릴 수가 없다.

  고도孤島의 저녁은 파도소리로 일어선다. 세상은 그믐인데 달로 떠 비춰줄 사람 보이지 않는구나. 선비는 더 꽁꽁 숨어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다향茶香만 높고 맑은 정신처럼 떠돌고 있다. 사람의 집에 사람은 오지 않고 봄비로 쓴 편지에 먼 데 있는 친구만 곡우穀雨의 향기를 덖어 마음을 보낸다. 뜨거운 차를 마셔도 선비의 가슴은 언제나 겨울이다. 학문과 경륜은 하늘에 닿았는데 선비의 마음 밭엔 언제나 눈이 내린다. 사람의 말을 잃고, 사람의 웃음을 잃고 등 돌린 마을의 그리움도 무채색으로 잦아들고 있다.

  선비여, 이제 나와라. 나와서 세상을 갈아엎어라.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 나와라. 어서 나와라. 인간의 마을이 무너지는데 마을 밖 작은 집에서 솔빛의 기상만 닦고 있을 참이냐? 가꾸던 겨울을 집어던지고 제일 먼저 와 동백으로 피는 제주의 봄을 숙성시켜 팔도에 옮겨 심어라. 그대의 겨울에 이제 덩굴장미를 심고, 소나무 잣나무 위에 새 몇 마리 불러와서 사람의 마을을 사람의 마을답게 가꿔야 한다.

 

대전문학89(2020년 가을호)

 

 

 

 

2020. 6. 30

 

posted by 청라

스승의 날에

 

 

이팝나무에

아이들 얼굴이 조롱조롱 피어난다.

 

그 사람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그리워할 이름 많아서 좋다.

 

아이스크림 한번만 돌려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하던 아이들

 

체육대회에서 꼴찌를 해도

미친 듯이 응원하던

그 흥은 아직 남았을까.

 

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미워할 사람이 많은 것보다

얼마나 고마운 삶인가.

 

날마다 드리는

간절한 나의 기도가

제자들의 앞길을

꽃길로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이팝 꽃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들을 향해

뻐꾸기 노래로 박수를 보낸다.

 

 

2020. 5. 15

posted by 청라

연꽃 같은 사람

                     장덕천 시인을 보며

 

 

당신은

새벽을 열고 피어난

연꽃 같은 사람

 

도시의 아픔은

그대 널따란 잎새에 앉았다가

아침 이슬로 걸러져

대청호 물빛이 되고

 

연향에 취해있던 호수의 바람은

향기의 지우개로

온 세상 그늘을 지워주러 간다.

 

영혼이 너무 따뜻해서

삶의 꽃술 하나하나가

시처럼 아름다운 사람

 

오늘도 대청호는

그대 한 송이 피어있어서

찰싹이는 물결소리에서도

향내가 난다.

 

 

2020. 6. 11

문학사랑133(2020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장미 빛깔의 말

 

 

무슨 꽃이냐고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묻지만

 

환하게 웃으면서

장미꽃이라 대답합니다.

 

백 번 천 번을 물어도

지워진 백지에

다시 도장이 찍힐 때까지

 

장미 빛깔의 말로

대답할래요.

 

“사랑”이라고

 

 

2020. 5. 30

시문학2020년 8월호

posted by 청라

둑길에서

둑길에서

 

 

반듯하게 걷지 않아도 좋다.

 

삶의 굽이만큼

구부러진 꼬부랑길

 

민들레꽃이 피었으면

한참을 쪼그려 앉아

함께 이야기하다 가도 좋고

 

풀벌레 노랫소리 들리면

나무로 서서 듣고 있다가

나비처럼 팔랑거려도 좋다.

 

달리지 않아도

재촉하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둑길에 모여 있다.

 

2020. 5. 21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