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뜰

그 여자의 뜰

 

 

정이 많은 여자는

아랫도리에서 언제나 진물이 흐른다.

 

겨울보다는 봄이 많이 머무는

그 여자의 뜰엔

탱자나무처럼 가시를 감춘 꽃들이 먼저 피었다.

 

바닷바람이 불러서 갔다는

남편은 세월 속에 지워지고

그 여자의 뜰이 황폐해질 때쯤

 

돌담이 무너졌다.

 

너무도 허기져서

이것저것 안 가리고 다 받아들인 바다처럼

그녀의 배는 탱탱해졌다.

 

그 여자의 뜰에는

파도가 산다.

뒤척이면 그냥 출렁대는 신음이 산다.

 

 

2021. 4. 17

 

 

posted by 청라

절망 앞에서

절망 앞에서

 

 

 송 작가 거실 벽에는

 죽어가는 바다가 걸려 있다. 

 조가비 딱지마다 한 몸인 양 기름이 엉겨 붙고, 갈매기 몇 마리는 타르의 밧줄에 묶여 박제剝製가 되었다. 한 쪽 눈만 겨우 자유를 지켜낸 갈매기 눈망울에 담긴 해안선, 바다의 온몸에는 버섯처럼 부스럼이 돋아났다. 바위도 나무도 온 세상이 겨울 빛으로 가라앉았다. 

 넓게 자리 잡은 바다의 절망에선

 하루 종일 한숨처럼 수포水疱가 떠올랐다.

 

 

2021. 3. 15

 

posted by 청라

고래를 조문弔問하다

 

 

 

해무海霧 접힌 후에야 알았네.

어젯밤 바다가 왜 그리 숨죽이고

흐느꼈는지.

 

9,5m 길이의 몸에

5,9kg 플라스틱을 채우고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누워있는 향고래

 

어미는 심해의 어둠 속을 헤매며

목메어 부르고 있을게다.

울다 울다 눈물이 말라

피를 흘리고 있을 게다.

 

저녁노을 삼베옷처럼 차려입고

을 하는 바다

갈매기 목소리 빌려

나도 고래를 조문弔問하네.

 

posted by 청라

적조赤潮

적조赤潮

 

 

심한 멍 자국 짓물러

바다의 신음은

온통 열꽃 빛이다.

 

돌아누울 힘도 없어서

혼절한 채 끙끙대는

파도는 온통 앓는 소리다.

 

 

posted by 청라

슬픈 바다

슬픈 바다

 

 

바다는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

세상의 눈물 나는 일들은

모두 바다에 모여 있다.

작년에 아프리카에서 반란군에 살해당한

어미의 슬픔과

플라스틱 병을 삼키고 허연 배를 드러낸

고래의 눈물이

소용돌이로 울고 있다.

더 이상 버리지 마라.

아침 해를 띄워 올리는

저 바다의 싱싱한 웃음 뒤에

한 그루씩 죽어가는

산호의 비명이 포말泡沫로 부서지고 있느니.

바다는 스스로 늘 제 몸을 닦고 있지만

이미 흠뻑 젖어

더 이상 젖을 곳이 없다.

세상이 버리는 아픔

모두 꽃으로 피울 수는 없다.

 

posted by 청라

내려가는 길

 

 

인생길 내려가다가

길가 풀밭에 편하게 앉아

풀꽃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서두를 일이 없어서 참 좋다.

 

올라가는 길에는 왜 못 들었을까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생명들의 속삭임

 

올라가는 길에서는

왜 못 보았을까

반겨주는 것들의 저 반짝이는 눈웃음

 

아지랑이 봄날에는 투명한 게 없었지.

서둘러 올라가

하늘 곁에 서고 싶었지.

 

모든 걸 내려놓고 앉은 후에야

아름다운 것 아름답게 보고 듣는

눈귀가 열려

 

노을에 물들면 노을이 되고

가을에 물들면

가을이 된다.

 

 

 

2021. 5. 5

대전문학93(2021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고사古寺에서

 

 

사랑은 저 대웅전 단청처럼

목탁소리 쌓여서

바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염불하는 저 노승의 얼굴처럼

풍경소리에 쓸린다고

자글자글 주름만 파여지는 것이 아니다.

 

옅어지며 법당의 향내가 묻어

더욱 익숙해지고 정이 가는 것

갈피마다 세월이 익어

더욱 깊어지는 것

 

소나무 길로 둘이 손잡고 걸어가면

넘어가는 노을도

지나온 발자국을 식지 않게 덮어주는 것

 

문학사랑137(2021년 가을호)

 

 

 

posted by 청라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그리움은

그리운 채로 그냥 남겨두자.

밤하늘 별들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멀리서 서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볼 수 없어 신비로움이 살아있기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사랑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만나자는 말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만나서 그리움이 깨어지는 순간

우리는 마음속의 보석 하나를 잃는 것이다. 

 

2021. 1. 30

 

 

posted by 청라

 

수련睡蓮피는 아침

 

 

당신의 웃음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당신의 향기는

물속에서도 씻겨가지 않습니다.

 

사랑이 가장 낮은 쪽에서

수줍은 미소로 피어

 

생우유 빛 살결과

밀어가 녹아있는 불타는 꽃술

 

! 당신은

한 번 빨려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저 늪 같은 사람.

 

 

2021. 1. 20

문학사랑136(2021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

나릿골 사랑

나릿골 사랑

 

 

아직 사랑하는 사람 만나지 못했으면

나릿골 감성마을

비탈진 언덕길 올라가 보아라.

골목이 끝나는 마지막 집에

요것조것 다 따지는 요즘 식 사랑 아니라

첫눈에 반하면 와락 안겨오는 옛날 식 사랑

한 사람 만날지 모르지.

러브레터로 떠오르는 달을 몰고 들어가

갈매기 목청을 빌려 진한 고백 한번 해 보아라.

해풍에 씻기고 씻긴 솔빛 사랑을

그 사람 가슴에 깊이깊이 심어놓아라.

촌스러워 더 정이 가는 알록달록한 지붕 아래

마지막 배가 들어오고

방파제 그늘 속으로 하루가 접히면

고단함도 때로는 낭만이 되기도 하지

소주 한 잔에 안주는 짭조름한 파돗소리

노래는 주인이 부르고

손님은 바다에 취하고

천 년을 해풍에 익은 해송의 춤 자락에 묻어

밤 내 사랑을 익히고 익히어라.

여명이 밝아오면 해당화로 피게

가슴을 들썩여 불을 지피거라.

실직국悉直國  사람들은 눈 감아도 알지.

순박한 눈빛에서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걸

새벽으로 해를 씻어 안고 내려오는

정다운 계단마다

햇살처럼 고이는 헌화가獻花歌 가락

 

 

2020. 12. 27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