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861건
글
아픈 손가락
오월은
초록빛 목소리로 온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오면
반짝반짝 빛나는 목소리들이
나를 찾아오지만
진짜 찾고 싶은 이름 하나
자폐증을 앓고 있던 화철이
제 이름도 쓰지 못하고
노래 하나 제대로 부르는 것 없었지만
풀꽃 가슴에 달아주면서
“선생님, 좋아요”
어떤 노래보다 듣기 좋던 노래
세월의 강 너머에서 가시로 찔러
언제나 피 흘리는 아픈 손가락
2019. 5. 7
글
내 고향 가교리
마곡사에서 떠내려 온
염불소리가
마음마다 법당 하나씩 지어주는 곳
눈빛이 풍경소릴 닮은 사람들
웃음 속에 냉이 향이
은은히 풍겨오는 곳
뒷산 뻐꾸기 노래
몸에 배어서
그냥 하는 말 속에도 가락이 흘러
지금도 내 노래의 곧은 줄기는
어릴 때 고향이 귓속말로 넣어준
그 목소리다.
2019. 5. 1
『대전문학』92호(2021년 여름호)
글
예술의 고향 진도
묵언수행黙言修行을 하라는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엊그제 목감기 기운이 살짝 비치더니 그것이 깜빡 내 목소리를 먹어버린 모양이다. 오늘은 ‘문학사랑’ 진도 문학기행이 있는 날인데 어찌해야할까. 진도는 꼭 가보고 싶은 섬이고 이 회장에게도 참여한다고 단단히 약속을 해 놓았기에 일단 참여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집결지인 시청 동문에 도착하니 아는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의외로 서울에 사시는 성기조 선생님도 참여하셔서 반가웠다. 진도가 고향이고 이번 여행을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한정민 시인도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인사에 바쁘다. 흥분되기도 하겠지. 중학교 2학년에 가출하여 어엿한 시인이 되어 많은 손님들을 이끌고 금의환향하는 고향 길에 어찌 만감이 교차되지 않겠는가.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진도대교를 건너자 꽃으로 덮인 진도가 반가이 우리를 맞는다. 진도대교는 1984년 완공된 길이 484m, 너비 11.7m의 다리이다. 해무海霧가 아직 다 걷히지 않은 다리 양편에 진도와 해남군의 낮은 산들이 흐릿하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배 12척으로 10배 이상의 적함 130여척을 격파한 역사의 현장. 칼을 한 번 뽑으면 산천을 쪼갤 것 같은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마음속으로 울려오는 북소리에 몸을 맡겨보았다.
장어탕으로 점심을 먹고 진도문인협회 오판주 회장과 김영승 사무국장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진도향토문화회관. 1979년 세계민속음악제에서 금상을 받은 바 있는 씻김굿을 비롯하여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다시래기 등 국가무형문화재 4종과 북놀이, 만가, 진도홍주 등의 무형문화재 3종 등 수많은 무형의 자원이 옛 모습 그대로 전승 보전되어 오고 있는 곳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인간문화재와 전수생 등에 의해 민속공연이 펼쳐진다는데 이번 주 공연은 ‘씻김의 미학’이었다. 달빛 요요히 내리비치는 바닷가에 해무는 뭉클거리고, 죽은 이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원한을 풀고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판이 벌어졌다. 북, 피리, 아쟁, 가야금 소리 높아지고 하얀 장삼을 입은 당골에미 무가가 공연장을 압도하는 가운데 ‘혼맞이소리’, ‘흥타령’, ‘고풀이’, ‘영돈말이’, ‘추억’, ‘길닦음’ 등의 공연이 차례로 진행될 때 나는 감동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망자의 넋이 극락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희고 긴 천으로 된 질베 위에 지전을 얹어두고 넋 당삭으로 그 위를 왔다갔다 닦으며 무가를 부를 때 나는 신 내림과 같은 깊은 황홀감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용장산성龍藏山城으로 가는 길은 온통 꽃길이었다. 길가에 줄지어선 벚나무마다 나비처럼 나풀나풀 꽃잎을 떨구고, 좌우로 연한 산마다 산 벚꽃이 절정이었다. 그 외로 복숭아꽃, 진달래꽃, 늦게 핀 목련꽃도 함께 어우러져 진도는 온통 꽃세상이었다. 진도는 아름다운 섬이 아니라는 지인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섬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용장산성龍藏山城은 고려 삼별초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고려 원종 11년(1270년)부터 14년(1273년)까지 근거지로 삼았던 성터이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을 하자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던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삼아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용장산성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아홉 달이 지나지 않아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하게 되고 다시 제주도로 옮겨 가니 그 때의 사람들은 지금 간 곳 없고 행궁 터와 석축만 남아있는 성터엔 봄꽃들만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역사의 무상함을 말해 무엇 할까. 인걸은 사라졌어도 자연은 항시 그대로인걸.
가이드 이산재 선생의 맛깔스런 너스레를 들으며 도착한 곳은 벽파진碧波津, 이순신 장군이 1597년 수군 진영을 장도에서 이곳으로 옮긴 이후 명량해전 직전까지 머물면서 작전을 구상했던 곳이다. 을씨년스런 날씨 속에 벽파진 전첩비碧波津戰捷碑가 우뚝 서있다. 정유재란 당시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전함을 물리친 명량해전 승리를 기념하고,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를 기리기 위해 1956년 진도군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했다 한다. 언덕 위에 솟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산 꼭대기를 거북 모양으로 깎은 후 받침돌로 삼아 그 위에 화강석으로 비를 세웠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글을 짓고 소전 손재형 선생이 글씨를 쓴 이 비는 2001년 향토유형유산 제5호로 지정되었다 하는데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임을 목청 높여 외치는 듯하였다. 정면 바로 앞에서 감포도가 빙그시 웃고 있고 그 뒤로 해남 어린포 마을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신비의 바닷길을 보다 시간에 쫓겨 도착한 곳이 운림산방雲林山榜. 마음 급한 여행자들과 달리 운림산방雲林山榜은 무르익은 봄 속에 허허한 자세로 서 있었다.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후기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이 기거한 곳이다. 남종화는 북종화와 구분되는 화법이다. 당나라의 문인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왕유를 비조로 하여 송나라를 거쳐 원나라의 사대가(四大家, 뛰어난 산수화가였던 오진, 황공망, 예찬, 왕몽을 이름), 명나라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같은 오파吳派의 문인화가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화법이다. 남종화는 북종화보다 존숭되었는데 중국 명청 시대에는 남종화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두 분파의 큰 차이점은 주로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있다. 북종화는 외형을 위주로 한 사실적인 묘사를 주로하고 남종화는 작가의 내적 심경, 즉 사의표출(寫意表出)에 중점을 둔다.
소치小痴 허련許鍊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다.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신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질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한 삼절을 이루게 되었다. 스승 추사 김정희가 죽은 후 49세가 되던 다음 해에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처음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하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의 터전으로서 운림각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관장님의 배려로 잠깐이나마 그림을 관람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치 허련을 비롯하여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전 허림, 의재 허백련, 그리고 허건의 손자들에 이르는 화맥의 산실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남해바다에 자리 잡은 보배섬 진도에는 3락과 3보가 있는데 진도민요 진도서화 진도토속주 홍주 등을 진도 3락이라 하고 진돗개 진도구기자 진도곽 등을 진도 3보라 한단다. 점심에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진도민요를 들으며 1락을 누렸고, 운림산방에서 서화를 감상하며 2락을 누린 것만도 복에 겨운데 저녁에 오판주 회장의 배려로 진도홍주를 마음껏 들면서 3락을 완성하였으니 어찌 복에 겨운 여행이 아니겠는가. 오 회장은 칵테일 솜씨도 뛰어나서 하얀 사이다에 빨간 홍주를 섞어 만드는 빛깔이 환상적이었다. 감기 때문에 술에 취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3락을 즐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첨찰산 아래 위치한 운림펜션의 품에 안길 때쯤엔 감기도 피로도 잊을 만큼 홈빡 취해있었다.
조찬을 들고 장전미술관長田美術館으로 향하였다. 진도 이 비좁은 섬엔 왜 이리 예술가들이 많은 것이냐. 일찍이 진도에 가서는 글씨와 그림, 그리고 노래 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 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진도 사람 중 민요 한 자락 못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고 그림 한 폭 못 그리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웃기는 소리 잘하는 가이드만 해도 차 안에서 부르는 진도아리랑 한 곡조가 그렇게 구성질 수 없었다.
장전미술관長田美術館은 서예가 장전長田 하남호 선생이 사비를 들여 건립한 미술관이다. 1989년 800여 평의 대지 위에 100여 평의 본가, 연원관, 양서재를 짓고, 150평의 3층 미술관을 건립하여 서예,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고대자기, 분재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마침 유채꽃이 피는 계절이어서 노란 유채꽃과 지다 만 벚꽃, 목련이 어우러진 미술관은 선경처럼 아름다웠다. 관장 하영규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추사 김정희의 명월송간조明月松間照, 이당 김은호의 미인도, 남농 허건의 하경산수화 등의 국보급 미술품을 보는 시간은 꿈 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추사의 그림을 보다 문득 왕유의 ‘산거추명山居秋暝’이 떠오른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空山新雨後[공산신우후]
天氣晩來秋[천기만래추]
明月松間照[명월송간조]
淸泉石上流[청천석상류]
竹喧歸浣女[죽훤귀완녀]
蓮動下漁舟[연동하어주]
隨意春芳歇[수의춘방헐]
王孫自可留[왕손자가류]
적막한 산에 내리던 비 개이니
더욱 더 쌀쌀해진 늦가을 날씨
밝은 달빛 소나무 사이로 비치고
맑은 샘물은 바위 위로 흐르네.
대숲 소란하더니 아낙들 씻고 가고
연 잎 흔들리더니 고깃배 내려가네.
봄꽃이야 시든지 오래되었지만
그런대로 이 산골에 머물 만하네.
하영규 관장의 요청으로 일행인 중산 조태수 선생이 ‘문향만리文香萬里’ 한 구절을 써서 남긴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 예술의 고향에 와서 예술에 문외한으로 구경만 하다 돌아가는 일은 얼마나 부끄럽고 쓸쓸한 일인가.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인 남도진성南桃鎭城으로 향하였다.
남도진성南桃鎭城은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삼국시대 백제 매구리현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1438년(조선 세종 20년)에 재 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둥그런 벽과 동 서 남문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성안에는 민가가 수십 호 들어서있다. 마을 사람들은 옛 성문을 통해 출입하고 있었다.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운교와 단운교 두 개의 운교(무지개다리)가 놓여있다. 두 개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다. 이 성은 1964년에 사적 제127호로 제정되었다, 우리는 성벽을 위를 걸어 성을 한 바퀴 돌았다. 패망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남동리를 감싸고 있는 성에도 꽃은 피었지만 쓸쓸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꽃이 무성히 피었을 때는 아무도 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꽃이 지고 흰 구름만 떠도는 역사가 되었을 때 후세 사람만 인생 무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전미술관素筌美術館을 대충 둘러보고 성기조 선생님, 김영수 학장님, 이 회장 그리고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첨찰산 쌍계사尖察山雙鷄寺로 향하였다. 예술도 술과 같아서 진도에 와서 그 향기에 너무 취하다 보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동해서랄까.
첨찰산 쌍계사尖察山雙鷄寺는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아주 오래 된 절이었다. 계곡 물이 쌍계사를 사이에 두고 쌍으로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일주문을 지나 산자락으로 접어드니 해탈문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쌍계사 경내에서는 아담한 대웅전이 우선 눈에 뜨인다. 숙종 23년에 중수되었다는 대웅전은 맞배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목존삼존불좌상이 빙긋이 웃고 계셨다. 나는 아홉 번 공손히 절을 올리고, 가족과 함께 온 세 사람의 건강을 빌었다. 대웅전 왼편으로는 정면 측면 1칸의 원통전이 자리 잡고 있고, 오른편으론 지옥을 다스리는 시왕을 모신 시왕전. 시간이 없어 모두 알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절 뒤로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등이 무성히 우거진 상록수림이 펼쳐져 있었는데 지다 만 동백꽃이 드문드문 매달린 동백나무는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성기조 선생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숲을 바라보았다. 참 대단한 어른이시다. 87세 넘은 나이로 피곤한 기색도 없이 여행을 즐기고 있다. 상록수림의 싱싱한 기운이 선생님의 팔다리로 모두 빨려드는 듯하였다.
듬북국으로 점심을 먹고, 진돗개 묘기를 관람한 후 버스는 대전으로 향했다. 전망대를 보고 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때마침 비도 내리고 안개도 짙어 올라가봐야 별로 볼 게 없으리라는 오판주 회장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진도대교를 얼마 안 남겨두고 한정민 시인이 모두 좌측을 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차창 밖으로는 낮은 산자락을 의지해 조그만 산마을이 누워있었다, 거기가 바로 한 시인의 고향이란다. 소 판 돈을 훔쳐서 저 마을을 뛰쳐나오던 그 시절 그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리도 없던 그 옛날 울돌목을 건널 때 얼마나 마음이 조급했을까. 생각해보면 가출한 소년치고는 반듯하게 잘 자라 시인이 되고 금의환향하였으니 그래도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임이 틀림없다. 나는 흐뭇한 눈으로 나이 많은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망울 속에서 이틀 동안 우리 마음을 풍요로운 예술향기로 감싸주었던 예술의 고향 진도가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글
목련 꽃봉오리
터지겠다.
펑 하고
입김만 호 불어도
한겨울 칼바람에
정淨한 혼魂 깎고 벼려
삼천리
한 몸으로 울릴
옥양목 빛 함성들아.
2019. 3. 26
글
사탕 하나
꼭 쥔 주먹 안에
반쯤 녹은 사탕 하나
아가는 잠자면서도
방긋 웃고 있다.
빨다가 너무 맛있어
엄마 주려고
꼭 쥐고 놓지 않는
쪼글쪼글한 알사탕 하나
2019. 3. 19
글
꽃이 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
삼월이 오면 우리가 할 일은
비둘기 맨발에
꽃신을 신겨주는 일이다.
얼마나 추운 것들이
많은 세상이냐.
우리가 봄 햇살 같이 다가가
꽁꽁 언 가슴마다
불씨 하나 지펴준다면
그리하여
빙산처럼 단단한 슬픔에
금 하나라도 가게 할 수 있다면
아! 눈물 맑은 노래들이 피어올라서
이 세상을 데워주겠지.
주위를 돌아보며 사는 일들은
꽃이 피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
2019. 3. 16
『시문학』581호(2019년 12월호)
『충청예술문화』94호(2020년 1월호)
글
삼월
산수유 뽀얀 숨결
언 가슴 녹인 불씨
비둘기 맨발에도
꽃신 한 짝 신겨줄까
잊었던 노래 가지마다
두런두런 피는 꽃등
털모자 벗으며
시든 사랑에 물을 주네.
듬성한 머리 사이
꽃대 한 촉 싹이 틀까.
신바람 나비 춤 앞세워
분홍 발로 오는 삼월
2019. 3. 1
글
미소가 따라와서
엊그제 마곡사
석가 불 그 미소가
내 꿈속 비좁은
골목까지 따라와서
아이 참, 욕하려 해도
빙그레 웃음만
그러게 살던 대로
막 살면 되는 게지
마음속에 부처는
왜 모시자 욕심 부려
아이고, 이제 큰일 났네
욕도 한 번 못하고
2019. 3. 6
글
제비꽃에게
콘크리트 사이에
뾰족이 고갤 쳐든 제비꽃아
괜찮다. 괜찮다.
목련꽃처럼 우아하지 않으면 어떠리.
겨우내 툰드라의 뜰에서
옹송그리고 지내다가
봄 오자 단단한 벽을 허물고 깃발 세운
네 눈빛만으로 골목이 환하지 않느냐.
괜찮다. 괜찮다.
어린 아이들아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떠리.
까르르 까르르
너희들의 웃음만으로도
온 세상이 환하지 않느냐.
2019. 2. 28
『충청예술문화』2019년 4월호
『한글문학』 20호(2020년 가을。겨울호)
글
서해의 저녁
바다의
비린내를
노릇노릇 구워놓고
지는 해
노른자처럼
소주잔에 동동 띄워
마신다.
귀가 열린다.
물새들의 속삭임에
기우는
하루해를
잡아서 무엇 하리.
잔 부딪칠
사람 하나
있으면 그만이지
파도로
어둠 흔들어
잠 못 드는 밤바다
2019. 2. 17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