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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가섭암 불빛
어머니 제사 지내러 늦은 날
회재를 넘어서면
철승산 꼭대기
남가섭암 불빛이 나를 반겨줍니다.
깜깜할수록 더 밝게
내 마음으로 건너옵니다.
등창만 앓아도 십이월 찬 새벽
눈 쌓인 비탈길 쌀 한 말 이고
남가섭암 오르시던 어머니
부엉이 울던 달밤
장독대 뒤에
물 한 사발 떠놓고 비시던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이 아들 고희 가까이 무탈하게
시인이 되어
시 잘 씁니다.
제사 지내고 고향 떠나며 다시
회재를 올라서면
앞길 비춰주려고 불빛이 앞장섭니다.
2017. 11. 1
『문학사랑』123호(2018년 봄호)
글
그리움 목이 말라 죽고 싶을 때
그리운 사람은
그리운 채로 그냥 놓아두자.
책갈피에 꽂아놓은 클로버 잎새처럼
푸른빛이 바래지 않게 그냥
추억의 갈피에 끼워만 두자.
봄날 아지랑이 피어올라
쿵쿵 뛰는 심장에 돛이 오를 때
그리운 것들 그립다고
세월 거슬러 불러내지 말자.
낙엽 지는 벤치에 노을 꽃 피어
그리움 목이 말라 죽고 싶을 때에도
눈물 나면 눈물 나는 대로
그리워만 하자.
그리움이
그대의 식탁 위에 오르는 순간
아름다운 날들은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문학사랑 122호(2017년 겨울호)』
2017. 10 29
글
엄기창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를 읽고
시 인 차 승 열
우편함에서 누군가 보내준 책을 꺼내보는 일은 썩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구나 요즈음 같은 디지털 시대에 새하얀 종잇장에 찍힌 갓 세상에 나온 활자 냄새를 맡는 일은
아련한 향수마저 불러온다.
"세한도에 사는 사내"라~
먼저 시집을 상재하신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시집 <세한도에 사는 사내>, 도서출판 이든북, 2017.9.27 | 암마저 나았다는 한 시인님의 말을 들으며, 시가 어떤 사람의 삶에는 밝은 등불이 될 수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시에 꽂히게 했으면 좋겠다. |
엄 시인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80년대 중반 <오늘의문학회>에서 일이니
선배님과 교분을 이어온 지도 줄잡아 30년은 넘었지 싶다.
엄 시인은 '엄부처'라는 별명처럼 천성적으로 온화한 인품을 타고 나신 그야말로 충청도 양반 중에
양반이시다. 시풍도 그가 태어난 공주 마곡사의 수려한 땅 기운을 받았음인가
결 고운 서정으로 채색된 그의 시편들에는
세상의 바라보는 깊고 따뜻한 시선이 담긴 느릿한 충청도 말씨가 담겨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은퇴의 졸업장을 받아들고 그야말로 은빛으로 빛나는 날들을 보내고 계신
엄 시인님의 네 번째 시그릇에는 어떤 시들이 담겨있을까?
엄 시인이 살고 계신 세한도의 달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
그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사방으로 열려서 신바람 난 바람이
울 밖 같은 울안을
한바탕 휘젓다 가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 집 사내는
청청한 외로움을 가꾸기 위해
덩굴장미 한 그루 심지 않았다 .
덩그렇게 세워 놓은 네그루의 소나무도
새 한 마리 불러오지 않았다.
제대로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평생을 마음 밭에 겨울만 들여놓고
뜰 밖을 둘러 친 울타리 대신
서릿발 같은 기상 온몸으로 반짝이며
아예 방문을 지워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스승
김정희를 위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구해온 귀한 책들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편지에
그려진 작은 그림으로, 제자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한 문인화이다.
추사는 전과 다름없이 스승으로써 자신을 섬기는 고마운 제자에게 이렇게 썼다.
"더구나 온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ㆍ이익만을 붙쫓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허비하고도 권세ㆍ이익에
돌리지 아니하고 마침내 해외의 한 초췌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돌리기를 마치 세상이 권세ㆍ이익에
붙쫓는 것과 같이 하니 어인 일인지요."
그렇다면 엄 시인님에게 세한도는 무엇이었을까?.
작품해설을 쓰신 문학평론가 조혜옥 님의 말처럼, 엄 시인님에게 세한도란?
"한 사내의 기개와 청청한 외로움'을 간직한 시적 공간이라는데 동의한다.
엄 시인님은 권세와 이익을 좇는 화려함과 거짓됨으로 치장된 세상을 초월한 세한도의 달집에 은둔해
살면서 시집 <세한도에 사는 사내>에 실린 여러편의 시에서 보듯이
부모에게는 착한 자식으로써, 아내에게는 믿음직한 남편으로써, 자식에게는 인자한 아비로써,
나아가 사회적으로는 후학양성에 평생을 몸바쳐온 교사로써 선비로써,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서예가, 금석학자, 화가로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세상의 버림을 받아 긴 세월 동안 유배지를 떠돌아야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당대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추사처럼 자신만의 기상과 지조를 키워왔던 것이다.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열려진 달집의 작은 문을 통해 시로써 세상과 소통해왔던 것이다.
엄 시인님을 쏙 빼어닮은 시 몇 편을 더 읽어보자.
네가 오리풀꽃으로 홍사초롱 밝혀든다면
나는 고추잠자리로
네 기다림 위에 날개를 쉬겠네.
우리들의 늦여름은 소리 없이 달려서
초록 사랑 빛바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네.
흔들어 봐요, 하늬바람아
때로는 오이풀꽃 도리도리해도
한 몸인 듯 돌이 되겠네
- 「오이풀꽃과 고추잠자리」 전문
엄 시인님이 태어난 해가 '51년이니 올해 예순일곱. 예전 같으면 노인네라고 불리울 나이인데도
아직도 문학소년처럼 해맑은 감성이 담긴 서정시를 쓰고 계시는가 하면,
할아버지 끌고 가는 리어카 위엔
할머니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다.
자가용은 못 태워줘도, 임자
리어카는 실컷 태워줄끼다.
심들어서 워쩐대유 워떠칸대유
올라가는 고갯길 바람이 살짝 밀어준다.
마른 수숫대 같아서 눈물 나는 사람
늦가을 햇살처럼 스르르 사라질까봐
뒤돌아보며 자꾸 말 걸며 숨차게 올라간다.
- 「늦가을 소묘」 전문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으시고 그늘진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밝은 등불' 같은 시를 들려준다.
소리치는 사람들은 깃발이 있다.
깃발 들고 모인 사람들은
제 그림자는 볼 줄 모른다.
조룡대에 와서
주먹질 하는 나그네들아
조롱대는 날마다 죽지를 자르고 싶다.
부소산에 단풍 한 잎 물들 때마다
어제보다 더 자란
소정방의 무릎 자국
가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화인
지느러미라도 있었다면
천 년 전 그 날
물 속 깊이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을
깃발 들고 목청만 높이는 사람들아.
비듬처럼 일어나는 부끄러움을 삭히려고
백마장 물살을 빌려 조룡대는
오늘도 머리를 감는다
- 「조룡대, 머리를 감다」 전문
어디 그뿐인가.
'듣는 대로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순을 지나 고희를 바라보고 계심인가
이 시대의 어른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쓴소리도 간간히 실려있다.
엄 시인님은 '시인의 말'에서 교직에서 은퇴한 뒤로 할 일이 없어졌다고 엄살하시지만
이제는 40년 넘게 시를 써 온 원로 시인 중에 한 분으로 더욱 더 정진하셔서
눈부신 서정이 담긴 아름다운 시편들로 점점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에 '밝은 등불'이 되는,
한번 꽂히면 기어이 피어나고야 마는 '환한 꽃'처럼 맑은 시향을 전해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그래서 우리 같은 얼치기 시인들은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 그늘에 눌러 앉아
청정하게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할수만 있다면,
달집 뒤편에 서있는 잣나무로 서서 시를 이야기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늙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서천 앞바다. 옛 문우들과 모임에서 엄 시인님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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