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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환향녀
소녀가 눈보라 속에 앉아 있다.
청동의 어깨 위에 쌓이는 겨울,
그녀의 삶은 늘 바람 부는 날이었다.
풀 수 없는 옷고름 안쪽에
부끄럼처럼 감춰졌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짐승 같은 울음
그녀의 오열嗚咽 속에는 늘 열대의 태양이
핏덩이처럼 거꾸로 떨어지고 있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 꿇고 내버린 건
정조貞操였다.
여인들의 절망이 까마귀처럼 날아올랐다.
행복은 호국胡國의 삭풍 속에서 이슬처럼 깨어지고
필리핀 열대우림 지옥에서 돌아왔지만
나는 돌아올 곳이 없었다.
나는 환향녀요, 위안부였다.
가랑잎을 덮은 꿩처럼 몸을 숨겨도
언제나 겨눠지는 손가락 칼날
화냥년 화냥년 화냥년
나를 버린 건 아버지였다. 남자였다.
그리고 조국이었다.
저희들이 살기위해 나를 버리고
삭정이처럼 마른 내 몸에 멸시의 화살을 쏘고 있느냐.
부끄럽지 않은 자 와서 돌로 쳐라.
세상은 눈으로 지워져 적막하고 모든 길들은 막혀있다.
꽃을 놓고 가는 아이도 눈물을 주고 가는 노인도
힘없는 정의보다는 거룩하다.
살아서는 아버지의 딸도 아니고, 조국의 딸도 아니고
그냥 더러운 몸뚱이었던 것을
동상으로 앉혀준 것이 정말 나를 위해서이냐.
파헤칠수록 더욱 붉어지는 상처를 보며
옛날에도 지금도 그냥 조신한 여자이고 싶다.
『시문학』2018년 3월호
『문학사랑』130호(2019년 겨울호)
글
비닐 편지
도시를 탈출하다 첨탑에 꿰인 비닐
무엇을 외치려고 비명처럼 몸 흔드나
땅거미 날개 펴듯이 쏟아지는 검은 종소리
한 집 걸러 한 개씩 십자가는 불 밝혀도
사랑은 말라가고 죄인은 더 많아지나
어둠의 세상 자르려 초승달 칼 하나 떴네.
소음뿐인 도시에 사랑은 죽었더라.
난민인 양 탈출하다 한 조각 꿈 깨어지듯
십자가 못 박힌 채로 늘어지는 비닐봉지.
2018. 1. 6
글
새해의 기원
무술년戊戌年 첫 새벽에 풍등風燈 하나 띄웁니다.
어둠을 뚫어내며 하늘로 올라갑니다.
부상扶桑까지 날아가서
밝고 뜨거운 태양을 불러오십시오.
이 땅의 겨울을
따뜻하게 녹여주십시오.
정유년丁酉年 한 해는 너무도 추웠습니다.
북녘 땅에서 연이어 미사일이 날아가고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폭탄이 덩치를 불렸습니다.
대륙은 사드를 핑계삼아
정치 경제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바다건너에선 이 땅을
전쟁터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우리끼리라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촛불과 태극기가 서로 높이를 겨루고
세월호의 망령은 창으로 아직도 민족의 가슴을 찌릅니다.
대통령은 탄핵을 당해 어둠 속에 갇히고
겨레의 결속은
갈가리 찢겨졌습니다.
사랑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증오를 부풀려서 빚은 나라입니다.
각 부처部處에는 전문가보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공신功臣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에
신명身命을 바쳐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는 과거를 단죄하느라 진을 빼기보다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차례입니다.
억새들도 서로의 등을 지키는 것이
혼자 바람을 견디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미움보다는 용서와 사랑으로 뭉쳐서
어깨동무하고 바람을 헤쳐갑시다.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는
무술년 이른 새벽에 풍등을 띄우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노니
희망 잃은 대한민국에 날개를 주셔서
금빛 날개로 온 하늘을 덮게 하소서.
2018년 1월 1일
『충청문화예술 201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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