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 광장에서


대전역 광장에서

淸羅 嚴基昌
핏빛 놀 속에서 비둘기가 튀어 나와
헛되이 선회하는
대전역 광장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묻혀 가고
누구의 외침이 등불로 설까
초겨울 화단에
국화꽃만 지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어깨동무하고
고삐 풀린 바람이 되어
거리를 질주하고
나는 빈 마음 빈 속으로 서서
손이 따뜻한 사람을 찾아 악수를 하고 싶다.
우리 둘이 맞잡은 손 끝에
이는 불꽃은
초봄 꽃보다 고운
연초록 움 티우는 따사한 햇살이어야지
산을 사르고 꿈을 사르고
우리들의 소중한 삼천리를 불태우는
미친 불길이 되어서는 안되지.


posted by 청라

가을 매미


가을 매미

淸羅 嚴基昌
매―애앰 매―애앰
매미가 울고 있다.
노래를 부르기만도 아까운
짧은 생애인데
매미의 목숨이 눈물로 녹고 있다.

빨판 속엔 매케한 수액의 묻어 나고
돌팔매에 잘린 더듬이
끝으로
회색빛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갈갈이 찢긴 고향의 밑동 아래
믿음의 알을 낳아야지
숲속의 나무들이 팔 뻗어
서로의 마음으로 기대어 살듯
매운 맛에 얼먹은 몸 속의 아기는
눈시린 하늘 아래 나래 펴고
노래하게 해야지.

매미의 꿈속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화염병이 날고,
질기게 잡고 있던 다리
진실의 한 끝이 유리처럼 부서지고

맴맴맴맴맴맴맴
매미가 소스라쳐 날아가고 있다.
노랗게 시든 플라타너스잎
고향을 떠나기엔 다 놎은 철에
매미는 탄환처럼 날아가고 있다.
posted by 청라

빈 접시


빈 접시

淸羅 嚴基昌
칼바람에 갈린 눈부신 햇살이
이마 위에 찰랑이는 가을날 오후
막막한 어둠이 발밑에 질척이는
지하도 입구로 들어서면

강가에 떠밀려와 버려진
고무신처럼
울 밖으로 밀려난 앞못보는 아이
아이가 받쳐든
빈 접시 하나,

팔매질 하듯 던져 넣은
동전 몇 개와
누군가 장난으로 넣고 간
낯설은 토큰
못다 채운 빈자리에는
겨울이 일찍 와 있다.

풀꽃배 띄워 보내던
어릴 적 꿈들이 죽고
달맞이꽃 피는 동산에서
손 마주 잡아주던
따뜻한 피도 식은 도회의 그늘 밑에서
절규하는 소리로 치켜든
빈 접시 무겁게 가라앉은
밤이 떠나지 않는 하늘
별 하나 못 뜨는 하늘

내가 꽃아주는 억새꽃으로
오늘밤 네 고향 산에
칠색 영롱한 무지개를 걸거라.
posted by 청라

서울의 천둥


서울의 천둥

淸羅 嚴基昌
서울의 하늘 위엔
늘 천둥이 운다.
내려올 곳이 너무 많아서
내리지 않고
北岳에서 南山으로 흐르며
울기만 한다.
대밭에 참새처럼 숨어
지저귀는
사람들은 알리라
천둥이
누구의 머리 위에서
우르릉우르릉 울고 있는지.....
번갯불보다 고운 어둠 밑에서
사람들은 번갯불에 타면 재가 될
靑紅의 꿈들을 만들고 있다.
posted by 청라

보문산에서


보문산에서

淸羅 嚴基昌
도심 쪽으로 등돌리고 앉은
보문산을 오른다.
초록빛 산꿩 소리로 눈 씻고
내려다 보면
서리맞은 고춧잎처럼 시들은
일요일 아침
몽롱히 풀린 도시
케이블카는 하루종일 바쁘게
솔바람 소리를 싣고 내려가지만
검은 연기 내뿜는
청운장 굴뚝 위에서
늦가을 나비모양 파닥이고 있다.
오늘 마시는 한 모금의 약수로
내일 아침 중앙로에서 몇 송이
싱싱한 웃음을 피워 내리라
산나리 꽃빛이 졸리운 시간......
posted by 청라

행군


행군

淸羅 嚴基昌
산 하나 넘으면
막사의 불빛이 보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길은
가도가도 낯설고
눈발에 가로막힌 별 하나만
절둑거리며 절둑거리며 따라 오는
집집마다 닫아 건 창가엔
회색빛 겨울
창날같이 개짖는 소리
길은 길로 이어져 끝이 없네.
산 하나만 더 넘으면
막사의 불빛이 보일 지도 모른다.
posted by 청라

사비가


사비가

淸羅 嚴基昌
낙화암 절벽 위엔 다홍빛
진달래꽃
천년으로 이어진 접동새 울음

달 밴 강물 속에
손짓이 있고
꽃잎은 한 잎씩 몸을 던진다.

백제도 신라도 아닌데
사비수 물소리는
젖어 흘러서,

접동새야!
올봄엔 떡갈잎 수풀 속에
소리 맑은 새끼새 알을 낳거라.
posted by 청라

조룡대


조룡대

淸羅 嚴基昌
누군가 한 사람 쯤
눈뜨고 있을 것 같아서
죽어서도 저승에 들지 못하고
歡樂宴 풍악 소리에
한숨짓는 용이 있을 것 같아서
조룡대 하늘을 이고 서 있다.
백마강 물결 따라
그 때처럼 노래소리는 들려오고
길게 누운 용의 잠 속으로
핏빛 눈물처럼 투신하는 진달래 꽃잎,
낙화암 가슴께를 치며 흐르는
세월을 보면
반도는 하나인데
마음들은 왜 이리 갈갈이 찢겨 펄럭이는가?
벗이여!
의자왕도 소정방도 보이지 않는
조룡대 위에 모두 와
물결의 속삭임을 들어 보게나.
욕심으로 뭉쳐진 바위도 부서져 모래알 되고
백마강 융륭한 흐름 위에 서면
인생은 잠시 반짝임일세.


posted by 청라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며

淸羅 嚴基昌
혼자 일어나 파란 힘줄 돋은
계룡산
등성이를 오르면
이마 위에 말갛게 떠 있는 여백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바람이 칼날처럼 후리고 가고
발아래 겨울을 인 작은 산들이
눈발에 부서지며 녹아들고 있다.
하늘 향해 한번 뾰쪽
솟아보지도 못하고
둥글게 둥글게 잦아든
충청도의 산이기에
흰옷 입은 모습이 더욱 가슴 저미게 젖어오는
산정에 서면
허리 낮추고
억새풀이나 붙안고 사는 능선마다
능선마다
듣는 이 없는 새 울음은 내리고 있다.
posted by 청라

금강


금강

淸羅 嚴基昌
강 윗마을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초록빛 섬에
물새는 늘 구구구
꿈꾸며 산다.
숨쉬는 물살 그 가슴에
한 송이씩
봉숭아 꽃물빛 불이 켜지면
미루나무 그늘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말갛게 씻겨
모래알로 가라앉고
혹은
강둑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는데
강심에 뿌리 내린 바위야
나도 이 비단결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그대 속삭임 들리는 곳이면
어디서나 발돋움하는
키큰 나무가 되고 싶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