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만에서

천수만에서

 

 

밤사이 철새들아, 안녕하신가.

 

기름띠에 갇혀

타르로 목욕하던

바다의 절망을 닦아낸 후

 

바다의 흥타령에

뽀얗게 윤기가 난다.

 

그래, 아직은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세상

 

 

posted by 청라

어머니 바다

어머니 바다

 

 

바다는

미나리 밭이다.

 

황토 빛 폐수廢水

바다에 들어가면

깊은 산 속 옹달샘 물이 된다.

 

간밤 봄비에

머리 감아 빗고

함초롬히 앉아있는 바다

 

품은 새끼들 살리려고 항시

마음을 정결淨潔히 닦는

바다의 몸에서

간 밴 행주치마 냄새가 난다.

 

바다는 어머니다.

 

 

posted by 청라

고해苦海

고해苦海

 

 

바다 가운데 나와 보면

알 수가 있지.

인생이 왜 고해苦海인지를

 

파도 한 자락 일어났다

스러지면

또 다른 파도가 일어서고

 

뱃머리에서 바라보면

삶의 바다는 온통 파도뿐이다.

 

절망 앞에서도

삶의 동력을 쉽게 끄지 말자.

힘들어도

묵묵히 달리는 배처럼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자.

 

오늘은 그냥 비운 채로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만선滿船으로

깃발 날리며 가는 날 있겠지.

 

 

 

posted by 청라

발해만渤海灣에서

발해만渤海灣에서

 

 

일만 사천 리 가쁘게 달려온

황하의 숨결

어찌 탁하지 않으랴

 

서해는

닦고 또 닦아

밤이면 별을 담는다.

 

posted by 청라

동해 일출

동해 일출

 

 

저 뜨거운 것을

바다는 어떻게 밤새 품고 있었을까

 

아플수록 더 깊이 끌어안았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함성의 폭죽

 

시대의 밤아

가거라

 

바다의 외침은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

 

 

posted by 청라

바다 꽃

바다 꽃

 

 

꽃이라는 말에는 늘 슬픔이 머물다 간다.

어딘지 좀 가녀리고 바라봐줄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난다는

 

동백꽃도 아직 다 피지 않았는데

제주 앞바다엔 바다 꽃이 먼저 피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달거리를 하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일이다.

바람은 아직 칼을 물고 있는데

테왁 위에 몸을 얹으면 난류가 흐르는 사람

 

그녀가 거느린 억센 바닷바람이

서방을 잡아먹었다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빗창, 정게호미, 소살만 몸에 꽂히면

바다 꽃으로 피는 여자

 

햇살과 갯냄새로만 화장을 해서

십 년은 더 늙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수평선을 배경으로 꽃으로 피어있을 때

바다는 몸살을 한다. 떨리는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에 노을을 칠해준다.

 

 

 

 

 

 

 

posted by 청라

바다는 가슴에 발자국을 찍지 않는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아픔의 불씨 하나 묻어놓는 것

 

바다는 그래서

가슴에 발자국을 찍지 않는다.

 

안개 속에 숨어 혈서를 쓰듯

물 위에 제 이름을 쓰는 물새들

 

그 뒤를 따라가며

흔적도 없이 지우는 파도

 

바다는 한 이름도 기억하지 않는다.

바다는 아파할 일이 없다.

 

 

문학사랑138(2021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그 사람의 천국

그 사람의 천국

 

 

그 늙은 어부는 갯벌에다가

마음의 천국을 지었다.

 

갯벌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게며 꼬막이며 세발낙지가

뻘밭에 빠져들게 한다.

 

먼저 간 아내는

얼굴마저 흐릿해지고

자식들은 영혼의 거리가

남보다 더 멀어지고

 

그 어부가 트롯보다 즐겨 듣는 노래는

썰물 빠지는 소리

 

사릿날 만삭의 몸 푼 그 사람의 천국

훤히 몸 안을 개방하면

어망 하나에 갯삽 하나 들고 가

삶의 아픔을 말갛게 씻고 돌아온다.

posted by 청라

바다를 닦아내다

바다를 닦아내다

 

 

갯바위들이 기름을 뒤집어쓴 채

박제剝製처럼 정지해 있다.

끓여낸 해물 탕 속의 식재료들처럼

게도 조개도 갈매기마저

검은 타르의 국물 속에 건더기로 떠있다.

방제복을 입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에

장화를 신은 채

사람들은 졸도해있는 바다 곁으로 다가섰다.

끊어진 빨랫줄처럼 해안선이

바람에 출렁거릴 때

사람들은 바다의 절망을 퍼내 자루에 담고

한숨의 찌꺼기를 긁어내었다.

수평선이 푸르게 일어설 때까지

기도祈禱의 걸레로

바다를 닦고 또 닦아내었다.

먼 바다의 바람도 잊지 않고 달려와

새 숨을 나눠줬다.

말기 암 노인처럼 누워있던 바다가

저녁놀에 기대어

봄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posted by 청라

만선滿船

만선滿船

 

 

엊그제 통통배 타고 바다에 나가

부유浮游하는 대양의 상처를 건져

만선滿船으로 돌아왔다. 

바다의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한사코 개화開花를 망설이던 해당화도

오늘아침 방긋 웃음 한 송이 피웠다. 

고깃배에 가득

플라스틱이며 비닐봉지를 채운 후

흐뭇하게 웃는 아비를 보고

아들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바다를 푸르게 전해주려는

아비의 애타는 마음 알기나 할까. 

만선滿船의 노을 날개 아래로

약간 기울었던 지구의 밸런스가

바로잡히고

갈매기 노랫소리에 윤기가 묻어난다. 

아직도 칭얼대는 미역들 어린 새순에게

격려激勵의 박수처럼

해당화 향기를 띄워 보낸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