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눈뜨고 자는가

바다는 눈뜨고 자는가

 

 

여수 앞바다가 빨갛게 각혈咯血하던 날

포구엔

바다로 나가지 못한

작은 배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가자미식혜를 잘 하는

이북할머니네 막걸리 집엔

바다 사내들만 푸념을 나누어 마시고 있다.

황토黃土를 실은 배들이

부지런히 항구를 드나들지만

뿌리고 또 뿌려봐야 새 발의 피

바다의 피부가 워낙 부스럼투성이라서

바람도 깨금발로 물을 건너고 있다.

김 서방네 양식장엔

벌써 우럭 새끼가 하얗게 떠올랐단다.

쑤시고 아픈 데가 너무 많아서

바다는 밤새도록 눈뜨고 자는가.

 

 

2021. 3. 16

 

posted by 청라

대양大洋이 뿔났다

대양大洋이 뿔났다

 

 

중앙 인도양을 달리다가 보면

대양大洋이 뿔났다.

 

칼스버그 해령海嶺이 로드리게스 섬에서

아덴만까지

섬 하나 없이 봉우리 문질러놓고

 

성질나는 밤이면 우르르 우르르

해저를 흔들며 으르렁댄다.

 

바다는 사막沙漠이다.

형형색색 빛나던 산호의 노래도

온난화溫暖化의 발톱에 찢기어 간다.

 

고국故國 남쪽 바다에 동백꽃이 핀 게 언젠데

뿔난 바다는

아직도 겨울을 벗지 못했다.

 

 

2021. 3. 6

posted by 청라

그 여자의 뜰

그 여자의 뜰

 

 

정이 많은 여자는

아랫도리에서 언제나 진물이 흐른다.

 

겨울보다는 봄이 많이 머무는

그 여자의 뜰엔

탱자나무처럼 가시를 감춘 꽃들이 먼저 피었다.

 

바닷바람이 불러서 갔다는

남편은 세월 속에 지워지고

그 여자의 뜰이 황폐해질 때쯤

 

돌담이 무너졌다.

 

너무도 허기져서

이것저것 안 가리고 다 받아들인 바다처럼

그녀의 배는 탱탱해졌다.

 

그 여자의 뜰에는

파도가 산다.

뒤척이면 그냥 출렁대는 신음이 산다.

 

 

2021. 4. 17

 

 

posted by 청라

절망 앞에서

절망 앞에서

 

 

 송 작가 거실 벽에는

 죽어가는 바다가 걸려 있다. 

 조가비 딱지마다 한 몸인 양 기름이 엉겨 붙고, 갈매기 몇 마리는 타르의 밧줄에 묶여 박제剝製가 되었다. 한 쪽 눈만 겨우 자유를 지켜낸 갈매기 눈망울에 담긴 해안선, 바다의 온몸에는 버섯처럼 부스럼이 돋아났다. 바위도 나무도 온 세상이 겨울 빛으로 가라앉았다. 

 넓게 자리 잡은 바다의 절망에선

 하루 종일 한숨처럼 수포水疱가 떠올랐다.

 

 

2021. 3. 15

 

posted by 청라

고래를 조문弔問하다

 

 

 

해무海霧 접힌 후에야 알았네.

어젯밤 바다가 왜 그리 숨죽이고

흐느꼈는지.

 

9,5m 길이의 몸에

5,9kg 플라스틱을 채우고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누워있는 향고래

 

어미는 심해의 어둠 속을 헤매며

목메어 부르고 있을게다.

울다 울다 눈물이 말라

피를 흘리고 있을 게다.

 

저녁노을 삼베옷처럼 차려입고

을 하는 바다

갈매기 목소리 빌려

나도 고래를 조문弔問하네.

 

posted by 청라

적조赤潮

적조赤潮

 

 

심한 멍 자국 짓물러

바다의 신음은

온통 열꽃 빛이다.

 

돌아누울 힘도 없어서

혼절한 채 끙끙대는

파도는 온통 앓는 소리다.

 

 

posted by 청라

슬픈 바다

슬픈 바다

 

 

바다는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

세상의 눈물 나는 일들은

모두 바다에 모여 있다.

작년에 아프리카에서 반란군에 살해당한

어미의 슬픔과

플라스틱 병을 삼키고 허연 배를 드러낸

고래의 눈물이

소용돌이로 울고 있다.

더 이상 버리지 마라.

아침 해를 띄워 올리는

저 바다의 싱싱한 웃음 뒤에

한 그루씩 죽어가는

산호의 비명이 포말泡沫로 부서지고 있느니.

바다는 스스로 늘 제 몸을 닦고 있지만

이미 흠뻑 젖어

더 이상 젖을 곳이 없다.

세상이 버리는 아픔

모두 꽃으로 피울 수는 없다.

 

posted by 청라

나릿골 사랑

나릿골 사랑

 

 

아직 사랑하는 사람 만나지 못했으면

나릿골 감성마을

비탈진 언덕길 올라가 보아라.

골목이 끝나는 마지막 집에

요것조것 다 따지는 요즘 식 사랑 아니라

첫눈에 반하면 와락 안겨오는 옛날 식 사랑

한 사람 만날지 모르지.

러브레터로 떠오르는 달을 몰고 들어가

갈매기 목청을 빌려 진한 고백 한번 해 보아라.

해풍에 씻기고 씻긴 솔빛 사랑을

그 사람 가슴에 깊이깊이 심어놓아라.

촌스러워 더 정이 가는 알록달록한 지붕 아래

마지막 배가 들어오고

방파제 그늘 속으로 하루가 접히면

고단함도 때로는 낭만이 되기도 하지

소주 한 잔에 안주는 짭조름한 파돗소리

노래는 주인이 부르고

손님은 바다에 취하고

천 년을 해풍에 익은 해송의 춤 자락에 묻어

밤 내 사랑을 익히고 익히어라.

여명이 밝아오면 해당화로 피게

가슴을 들썩여 불을 지피거라.

실직국悉直國  사람들은 눈 감아도 알지.

순박한 눈빛에서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걸

새벽으로 해를 씻어 안고 내려오는

정다운 계단마다

햇살처럼 고이는 헌화가獻花歌 가락

 

 

2020. 12. 27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

삼척에 가면

삼척에 가면

 

 

바다의 탁본拓本을 뜨러

삼척엘 갔네.

그믐밤의 어둠을 짙게 칠했다가

초하루 아침의 맑은 햇살로 벗겨내면

파도의 싱싱한 근육들과 갈매기 소리,

삼척 사람들 다정한 미소가

해국海菊으로 피어있네.

태백을 넘어올 때 서둘러

손 흔들던 가을이

죽서루와 어깨동무로

빨갛게 타고 있는 곳

찍혀 나온 바다엔

좋아하면 모두 다 주는

삼척 사나이의 막걸리 맛 웃음소리가

산호초 사이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네.

 

2020. 10. 27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때 아름답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두 잔의 커피를 시켜놓고

홀로 커피를 마신다.

외로움이 커피 향으로 묻어난다.

창밖 먼 바다엔 어디로 가는지

배 한 척 멀어지고

유리창에

갈매기 소리들이 부딪혀 떨어진다.

이별을 말하던 날 빛나던 해당화는

다홍빛이 아직 다 바래지 않았는데

나는 왜 노을 지는 저녁이면 여기에 와서

쓸쓸히 바다에 취해있는가.

주인 없는 찻잔을 바라보며

긴 한숨 내뱉으면

그리움은 사랑보다도 달콤하다.

 

 

2020. 9. 11

문학사랑134(2020년 겨울호)

시문학598(20215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