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촌


어촌

淸羅 嚴基昌
바다의 노래를 실러
배들이 떠나갔다.
마을은 텅 빈 공간 속에 누워 있다.
물비늘 번득이는 바다의 자유
동풍에 자유가 범람하고
아낙들의 빈 가슴이 까치집처럼 열려 있었다.
그대 돛대 끝이 휘저어 놓는 하늘
하얀 갈매기가 투시의 눈을 반짝이며
소리개처럼 돌아가는 날개 밑으로
마을은 이제 허청허청 일어나
두런두런 돌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계탑이 위잉위잉 울고 있었다.
배보다 먼저 돌아온 바다의 노래들이
뒤집히는 파도 위에서 하얀 몸체를 드러내고
마을의 한 끝을 치고 있었다.
아낙들의 가슴 속으로 춤추며 춤추며 스며들고 있었다.
posted by 청라

아침 序曲


아침 序曲

淸羅 嚴基昌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絃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posted by 청라

큰 스승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23. 11:46

큰 스승 (송시)
(박교식 선생님 정년퇴임식에서)

淸羅 嚴基昌

당신은
산바람에 씻기고 씻긴
소나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

한평생 올곧게
교단을 지키며
제자들의 마음도
곱게곱게 가꿔준 사람

산나리 꽃같이 숨어 피어
드러나지 않게
빛을 세워서
세상을 시나브로 밝혀가면서

어느덧 걸어온 당신의 발걸음은
제자들을 위한 눈물로
사십년을 넘겼습니다

질기디 질긴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당신은 참으로 큰 스승입니다.

posted by 청라

풀의 나라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4. 22:45

풀의 나라

淸羅 嚴基昌
풀이 일어나서
메마른 땅을 푸르게 덮는다.

뿌리끼리 서로 손을 맞잡아
땅 속의 모든 자양분을
빨아올리고

덩굴의 촉수를 감아 올려
나무도
꽃도
목을 조른다.

풀만 남은 풀의 나라엔
하늘 향한 발돋움이 없다.

풀잎끼리 팔 벌려
옆으로만 힘을 겨루며
한 뼘 더 뻗으려는
아우성만 있다.
posted by 청라

재회(再會)의 밤에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3. 17:11

재회(再會)의 밤에

淸羅 嚴基昌
보리암 앞 바다는
나를 보고
온 몸을 꿈틀거렸다.

수줍은 노을이
바다의 볼에
연지를 찍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르르 우르르
함성으로 달려들었다.

밤꽃 냄새가
온 바다를 덮었다.

초승달로 몸을 담그고
경련하는 바다의 몸속에 한 가닥씩
월광을 토해 내었다.
posted by 청라

연꽃 마을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3. 17:08

연꽃 마을에서

淸羅 嚴基昌
도심(都心)에서 날 선 사람들도
연꽃 마을에 와선 눈빛이 지순해 진다.

아침 해 떠오를 무렵
연꽃이 피면
연꽃 향기 찻잔에 담아 마시고

뻐꾸기 울음 너머 속 숨결에 번져오는
대청호 물비늘
연꽃 그림자

반갑게 내미는 손길에
봄볕 같은 정이 담겨 있어서
미소가 향기로운 연꽃마을 사람들은

연 옆에 서 있으면
그냥 연꽃이 된다.

대청호에서 건너오는 바람들도
연꽃 마을에 와서
연향(蓮香)에 몸을 씻는다.

나도 마음 닦으러 대청호로 가다
이 마을에 들러
도심(都心)에 찌든 얼룩 지우고 돌아온다.
posted by 청라

청년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3. 00:25


靑年
淸羅 嚴基昌

청년은 스무 살 안팎 나이의
사내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모진 바람 앞에서도
초목처럼 싱싱한 꿈을 접지 않으며
한 번 발걸음 내딛으면
절대로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너희들이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이만큼 와서
한 자락 남은 삶의 비탈이 가파르다고
숨을 헐덕이며 쉬려 하느냐

잠은 달콤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면
네 옆을 걷던 사람들은 까마득히
뒷모습도 보이지 않아
길은 거기서 끊어지고

뒤돌아보는 발자국엔
아프게 달려온  고통의 흔적 헛되이 남아
아물지 않은 상처 화석으로 굳을 것이다

조금만 더 걸어라
가시덤불 우거져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너희들의 정상은
하늘과 어우러져 저 위에서 빛나고 있나니,

세월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더라도
멈추지 않는 사람의 가슴에
더 많이 고일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걸어라
고개는 거의 끝나 가는데
꿈꾸는 것을 그만 멈추려느냐

청년은 스무 살 안팎의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어떤 고난에도 쓰러지지 않고
헤쳐 가는 사람의 이름이다
posted by 청라

독도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0. 21:45

독도


淸羅 嚴基昌
외로움도 깊어지면 담청 빛
눈물로 고여
속울음 가슴앓이 뼈만 남은 팔뚝에

동풍에 넋을 갈아 깃발로 세운
엄마엄마 울던 아이 풍랑이 혼자 키운

국토의
막내야
해당화 한 송이도 못 피우는 작은 가슴에
무에 그리 한없이 담은 게 많아

오늘도 눈 부릅뜨고
잠 못 이루나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 당신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0. 21:43

산나리꽃 당신

 
淸羅 嚴基昌
아내의 마음은
산나리 꽃빛이다.
한 줄기 가녀린 몸 위에
햇살 웃음 피워 놓고
언제나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아내의 눈동자는
하늘 담은 옹달샘이다.
때로는 내 마음에 티끌 일어나면
꽃구름으로 피어나서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내여
당신은 내 일상(日常)의 숲을 지켜주는
키 큰 산나리 꽃이다.


하루 종일 동동거리는
당신의 발걸음을 보며
다시 태어나도 당신 곁에 서서
거센 바람 막아주는 나무이고 싶다.

posted by 청라

향일암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9. 22:53

향일함(向日庵)에서

淸羅 嚴基昌
절 마당은
무량(無量)의 바다로 이어지고

무어라고 지껄이는 갈매기 소리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바다를 지우며 달려온 눈보라가
기와지붕을 지우고
탑을 지우고

목탁(木鐸)소리마저 지운다.

지워져서 더욱 빛나는
관음상 입가의 미소처럼

나도 눈보라에 녹아서
돌로 나무로 바람으로 지워지면
갈매기 소리 알아듣는 귀가 열릴까.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

시학과 시창간호(2019년 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