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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해당되는 글 529건
글
나팔꽃 꽃밭에서
淸羅
嚴基昌
덩굴이 뚝심 있게 감아 올라간
나팔꽃 꽃밭에서
네 소리의 빛깔을 투시하기 위해
호흡을 멈춘다.
먼 길을 돌아와 꽃이 된
나의 말이여
지난 가을 까만 씨로 떨어져
찬바람에 갈리고 갈린
나의 말이여
송이송이 여단 나팔마다
소리소리 일어나 함성이 되거라
나비 한 마리 부르지 못하는
꽃술 밑에서
빈 씨앗으로 조그맣게 익어가는
나의 말이여.
나팔꽃 꽃밭에서
네 소리의 빛깔을 투시하기 위해
호흡을 멈춘다.
먼 길을 돌아와 꽃이 된
나의 말이여
지난 가을 까만 씨로 떨어져
찬바람에 갈리고 갈린
나의 말이여
송이송이 여단 나팔마다
소리소리 일어나 함성이 되거라
나비 한 마리 부르지 못하는
꽃술 밑에서
빈 씨앗으로 조그맣게 익어가는
나의 말이여.
글
끈
淸羅
嚴基昌
한 여자가 끊고 지나간
길,
눈발이 날린다.
만월처럼 둥근 배가 쫓아와서
앞길을 막아서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절의
끈 한 편에
풀꽈리처럼 조그맣게 매달린
내 금간 하루,
햇빛을 막아서는
저 질긴 끈을 자를 칼은 없는가,
자동차 안에서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며
그 강한 주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길,
눈발이 날린다.
만월처럼 둥근 배가 쫓아와서
앞길을 막아서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절의
끈 한 편에
풀꽈리처럼 조그맣게 매달린
내 금간 하루,
햇빛을 막아서는
저 질긴 끈을 자를 칼은 없는가,
자동차 안에서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며
그 강한 주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글
만추
淸羅 嚴基昌
개살구빛 햇살들이 미꾸라지처럼
구름 속으로 파고 든다.
잔광이 비늘처럼 잘게 부서지는 하늘로
제비 한 마리 높이높이 차올라
몇 올 빛가루를 줍고 있다.
점점 낮아오는 北天의 껍질 밑으로
야윈 풀벌레 울음이 흐르고
부리 끝이라도 부빌 溫氣를 캐러
구름 속으로 들어간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떨고 있는 빨래줄마다
노랗게 돋아나는 한숨
눈물이 흔한 단풍나무가
화장을 지운다.
구름 속으로 파고 든다.
잔광이 비늘처럼 잘게 부서지는 하늘로
제비 한 마리 높이높이 차올라
몇 올 빛가루를 줍고 있다.
점점 낮아오는 北天의 껍질 밑으로
야윈 풀벌레 울음이 흐르고
부리 끝이라도 부빌 溫氣를 캐러
구름 속으로 들어간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떨고 있는 빨래줄마다
노랗게 돋아나는 한숨
눈물이 흔한 단풍나무가
화장을 지운다.
글
제주해협
淸羅 嚴基昌
섬들의 발꿈치를 벗어나자
바다는 막막하게 지워져버린다.
북빙양을 돌아온 흰 말떼들도
보이지 않는다.
푸른 물살에 담긴 하늘의 음성 속으로
발자욱을 찍으려 하루내내 오르내리던
갈매기 노래소리도 보이지 않는다.
소금기 서걱이는 검은 바람에 쫓겨
사람들은
좁은 선실 속으로 숨어들고
하늘과 맞닿은 광막한 여백
멈춘 시간 속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먼 섬 기도로 반짝이는 불빛이여!
가보지 목한 곳의 따스한 이야기들이
불빛을 통해 건너오니
어둠은 나를 지우지 못했구나
텅 빈 공간 속에 말간 공기로
허허로운 어둠으로 녹아들지 못했구나
저녁에 마신 한잔의 소주 열기로
몽롱히 가라앉는 人事의 그림자
검은 장막을 접고 배는 달리고
새벽이 오면
댓순처럼 청청히 일어설 바다의 음악처럼
나의 무릉도원은 짜릿하게 가까워온다.
바다는 막막하게 지워져버린다.
북빙양을 돌아온 흰 말떼들도
보이지 않는다.
푸른 물살에 담긴 하늘의 음성 속으로
발자욱을 찍으려 하루내내 오르내리던
갈매기 노래소리도 보이지 않는다.
소금기 서걱이는 검은 바람에 쫓겨
사람들은
좁은 선실 속으로 숨어들고
하늘과 맞닿은 광막한 여백
멈춘 시간 속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먼 섬 기도로 반짝이는 불빛이여!
가보지 목한 곳의 따스한 이야기들이
불빛을 통해 건너오니
어둠은 나를 지우지 못했구나
텅 빈 공간 속에 말간 공기로
허허로운 어둠으로 녹아들지 못했구나
저녁에 마신 한잔의 소주 열기로
몽롱히 가라앉는 人事의 그림자
검은 장막을 접고 배는 달리고
새벽이 오면
댓순처럼 청청히 일어설 바다의 음악처럼
나의 무릉도원은 짜릿하게 가까워온다.
글
얼룩
淸羅 嚴基昌
비어 있는 하늘이
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러기 한 마리
그리고 지나가는 하얀 금 위에
그리운 자장가 소리 철렁대며 걸리고
천 가닥 넘어 쏟아지는 달빛 이랑
이제는 아무도 올 수 없는 길로
어릴 때 내 빈 몸 빈 마음의
작은 날개들이
푸득대며 날아오르는 청랑한 소리.
비어 있는 하늘이
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밤새워 짠 베틀로는
한 파람의 겨울도 막을 수 없는
귀뚜라미의 허전한 발
걸어가는 발 밑에 눈뜨는
자잘한 이야기들이
진하디 진한 얼룩으로 남는다.
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러기 한 마리
그리고 지나가는 하얀 금 위에
그리운 자장가 소리 철렁대며 걸리고
천 가닥 넘어 쏟아지는 달빛 이랑
이제는 아무도 올 수 없는 길로
어릴 때 내 빈 몸 빈 마음의
작은 날개들이
푸득대며 날아오르는 청랑한 소리.
비어 있는 하늘이
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밤새워 짠 베틀로는
한 파람의 겨울도 막을 수 없는
귀뚜라미의 허전한 발
걸어가는 발 밑에 눈뜨는
자잘한 이야기들이
진하디 진한 얼룩으로 남는다.
글
풍경
淸羅 嚴基昌
찢어진 꽃잎처럼
나비 한 마리
길 가운데 누워
파닥이고 있다.
구둣발 하나
나비를 밟고 지나간다.
구둣발 둘이
나비를 밟고 지나간다.
비명을 묻히고 무심히 돌아가는
구둣발
하나
둘
셋......
동양백화점 피뢰침에
죽지를 꿰어 주저앉은 낮달
기침하는 도시를 비추다
골목으로 눈을 돌리면
나비의 문신 가슴에 새긴
내게서만
나비는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나비 한 마리
길 가운데 누워
파닥이고 있다.
구둣발 하나
나비를 밟고 지나간다.
구둣발 둘이
나비를 밟고 지나간다.
비명을 묻히고 무심히 돌아가는
구둣발
하나
둘
셋......
동양백화점 피뢰침에
죽지를 꿰어 주저앉은 낮달
기침하는 도시를 비추다
골목으로 눈을 돌리면
나비의 문신 가슴에 새긴
내게서만
나비는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글
섬
淸羅 嚴基昌
박꽃 아래엔
박꽃만한 그늘이 하나 버려져 있다.
어둠의 갈매기들이
눈부시게 하얀 알을 낳는다.
은밀한 세상을
투명하게 벗겨내는 달빛의 바다
외로운 섬 하나 남아
진초록 비밀을 가꾸어 있다.
달빛이 수평으로 파도쳐 온다.
펄렁 젖혀진 기슭에
숨죽여 누워 있는
비밀의 속살이 보인다.
가냘픈 대궁이 위태로운 섬
풀려진 달빛 속에 묻혀 있는 섬
지켜야 할 어둠으로
포만한 배를 끌고 길게 누워 있다.
박꽃만한 그늘이 하나 버려져 있다.
어둠의 갈매기들이
눈부시게 하얀 알을 낳는다.
은밀한 세상을
투명하게 벗겨내는 달빛의 바다
외로운 섬 하나 남아
진초록 비밀을 가꾸어 있다.
달빛이 수평으로 파도쳐 온다.
펄렁 젖혀진 기슭에
숨죽여 누워 있는
비밀의 속살이 보인다.
가냘픈 대궁이 위태로운 섬
풀려진 달빛 속에 묻혀 있는 섬
지켜야 할 어둠으로
포만한 배를 끌고 길게 누워 있다.
글
山水圖
淸羅 嚴基昌
꾀고리 울음소리가
개나리꽃 가지에 불을 붙이고 있다.
햇살이 양각으로 박아 놓은 老翁의 낚시 끝에는
청청한 산그림자가 걸려 있고
누군가 넘어 오라는
아스라한 고갯길 따라
저녁 연기로 골골이 잦아드는
저녁 골안개.
버들강아지 줄기로 서서
조롱조롱 열린 귀에는
온종일 골물 소리만 들려오고
투명하게 벗어 오히려
속 깊은
하늘 한복판에
예닐곱살 소녀의 투정처럼 피어난
맨드라미만한 구름 한 송이
개나리꽃 가지에 불을 붙이고 있다.
햇살이 양각으로 박아 놓은 老翁의 낚시 끝에는
청청한 산그림자가 걸려 있고
누군가 넘어 오라는
아스라한 고갯길 따라
저녁 연기로 골골이 잦아드는
저녁 골안개.
버들강아지 줄기로 서서
조롱조롱 열린 귀에는
온종일 골물 소리만 들려오고
투명하게 벗어 오히려
속 깊은
하늘 한복판에
예닐곱살 소녀의 투정처럼 피어난
맨드라미만한 구름 한 송이
글
황혼 무렵
淸羅 嚴基昌
물총새의 눈동자가
돌의 적막(寂寞)을 깔고 앉아서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
노을 속에서 물고기의 비늘들이
더욱 빛나고 있다.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
숨을 죽이고
온 몸 털 세워 바라보는 저
바위의 응시(凝視).
물총새의 부리 끝에
반짝
물비늘이 일렁인다.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
그 어둠마저도 아름다운 황혼 무렵에…….
돌의 적막(寂寞)을 깔고 앉아서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
노을 속에서 물고기의 비늘들이
더욱 빛나고 있다.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
숨을 죽이고
온 몸 털 세워 바라보는 저
바위의 응시(凝視).
물총새의 부리 끝에
반짝
물비늘이 일렁인다.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
그 어둠마저도 아름다운 황혼 무렵에…….
글
빈집
淸羅 嚴基昌
지난 가을 사립문 닫힌 뒤에
다시는 열리지 않는
산 밑 기와집
겨우내
목말랐던
한 모금 햇살에
살구꽃만 저 혼자 자지러졌다.
노인 하나 산으로 가면
집 하나 비고
집 하나 빌 때마다
논밭이 묵고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골목마다
농성하듯 손들고 일어서는
무성한 풀들
저 넓은 논밭은 이제 누가 가꾸나.
다시는 열리지 않는
산 밑 기와집
겨우내
목말랐던
한 모금 햇살에
살구꽃만 저 혼자 자지러졌다.
노인 하나 산으로 가면
집 하나 비고
집 하나 빌 때마다
논밭이 묵고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골목마다
농성하듯 손들고 일어서는
무성한 풀들
저 넓은 논밭은 이제 누가 가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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