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군


행군

淸羅 嚴基昌
산 하나 넘으면
막사의 불빛이 보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길은
가도가도 낯설고
눈발에 가로막힌 별 하나만
절둑거리며 절둑거리며 따라 오는
집집마다 닫아 건 창가엔
회색빛 겨울
창날같이 개짖는 소리
길은 길로 이어져 끝이 없네.
산 하나만 더 넘으면
막사의 불빛이 보일 지도 모른다.
posted by 청라

사비가


사비가

淸羅 嚴基昌
낙화암 절벽 위엔 다홍빛
진달래꽃
천년으로 이어진 접동새 울음

달 밴 강물 속에
손짓이 있고
꽃잎은 한 잎씩 몸을 던진다.

백제도 신라도 아닌데
사비수 물소리는
젖어 흘러서,

접동새야!
올봄엔 떡갈잎 수풀 속에
소리 맑은 새끼새 알을 낳거라.
posted by 청라

조룡대


조룡대

淸羅 嚴基昌
누군가 한 사람 쯤
눈뜨고 있을 것 같아서
죽어서도 저승에 들지 못하고
歡樂宴 풍악 소리에
한숨짓는 용이 있을 것 같아서
조룡대 하늘을 이고 서 있다.
백마강 물결 따라
그 때처럼 노래소리는 들려오고
길게 누운 용의 잠 속으로
핏빛 눈물처럼 투신하는 진달래 꽃잎,
낙화암 가슴께를 치며 흐르는
세월을 보면
반도는 하나인데
마음들은 왜 이리 갈갈이 찢겨 펄럭이는가?
벗이여!
의자왕도 소정방도 보이지 않는
조룡대 위에 모두 와
물결의 속삭임을 들어 보게나.
욕심으로 뭉쳐진 바위도 부서져 모래알 되고
백마강 융륭한 흐름 위에 서면
인생은 잠시 반짝임일세.


posted by 청라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며

淸羅 嚴基昌
혼자 일어나 파란 힘줄 돋은
계룡산
등성이를 오르면
이마 위에 말갛게 떠 있는 여백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바람이 칼날처럼 후리고 가고
발아래 겨울을 인 작은 산들이
눈발에 부서지며 녹아들고 있다.
하늘 향해 한번 뾰쪽
솟아보지도 못하고
둥글게 둥글게 잦아든
충청도의 산이기에
흰옷 입은 모습이 더욱 가슴 저미게 젖어오는
산정에 서면
허리 낮추고
억새풀이나 붙안고 사는 능선마다
능선마다
듣는 이 없는 새 울음은 내리고 있다.
posted by 청라

금강


금강

淸羅 嚴基昌
강 윗마을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초록빛 섬에
물새는 늘 구구구
꿈꾸며 산다.
숨쉬는 물살 그 가슴에
한 송이씩
봉숭아 꽃물빛 불이 켜지면
미루나무 그늘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말갛게 씻겨
모래알로 가라앉고
혹은
강둑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는데
강심에 뿌리 내린 바위야
나도 이 비단결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그대 속삭임 들리는 곳이면
어디서나 발돋움하는
키큰 나무가 되고 싶다.
posted by 청라

山 속의 찻집


山 속의 찻집

淸羅 嚴基昌
구천동 돌아오는 물소리가
꿈결 같은
산 속의 찻집

엽차를 내놓는 主人의
눈빛 속에
아련히 산수리치 냄새가 풍기고

철이른 눈발이
새소리처럼 반짝이는
정결하게 가라앉은 산의 가리마

무엇을 위해서 뛰고 있는가?
반쯤 감긴 잠 속으로
돌 돌 돌
스며오는 맑은 물소리

찻잔 속에 가라앉은
세상이
꿈 밖에 멀다.
posted by 청라

아침


아침

淸羅 嚴基昌
계룡산 쪽으로 문을 열리

핏줄 속을 졸졸졸
도랑물 소리로 울리게 하면
뿌리 끝 어디엔가 아슴아슴 누워 있던
내 어릴적
칡맛 같은 정신이 살아나서

그대가 내 그림자를 밟고
문패를 달고 있는 나무라지만
우리가 맺은 이 진한 고리로
목탁 소리를 심어 그대 앞길 빌어 주리

한 방울 이슬에 갇혀
떨어지는 아침이라도
계룡산 쪽으로 문을 열리

마음을 비워 놓고
큰 산이 되리
posted by 청라

달맞이


달맞이

淸羅 嚴基昌
보름이 와서
보문산 숲속으로 두둥실 달이 솟았다.

칼바람 들판
깡통 속에 불을 사르며
흥겨운 어깨춤 노랫가락
고향은 어디에도 없고

연을 잃어버려
꿈도 없는
콩나물 같은 내 아이 둘

올해는 헐멋은 가슴에
전설같은
이 애비의 어릴적 보름달을 안아라.

심심풀이로 꽃을 꺾는
네 통통한 손으로 애비의 손 잡고
두엄 냄새 풋풋한 골목이 있어
인정도 있는
아버지의 어릴 적 고향으로 가자.
posted by 청라

省墓


省墓

淸羅 嚴基昌
상여 뒤 따르며 울 때는
솔방울마다 요령 소리로 울어
하늘이 무너지더니
남같이 낯설어진 들국화 한 송이만
반색하는
아버님 무덤에 머리 숙인다.
봉분엔 햇살이 잘 고이고
묘지 옆 참나무 썩은 등걸에
영자 버섯으로 피어난 자식 걱정
‘저승은 늘 춥고 바람 불 텐데
제 염려 거두시지요’
두 번 절하고 올려다 보면
在靑龍 石白虎머리 위로
상현달 하나 나를 지켜 보고
돌아서 가는 자욱마다 채워주는
허전한 저녁 어스름,
아버님 음성…
posted by 청라

아버님前上書


아버님前上書

淸羅 嚴基昌
아버님 목소리 땅에 묻던 날
대밭에서는
하루종일 대순이 돋았습니다.
한 줄금 내린 소나기로
목타던 대지가 젖어
취나물 향기 이내처럼 번지고
꾀꼬리 소리도 윤기 있게 반짝이며
개나리꽃 빈 가지에
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초승달 질 무렵
초승달 신고
뒤돌아보며 강 건너가서
착하게 사신 생애 기름으로 태워
이승의 봄 밝히는 등이 되셨나…
철성산 풀빛 짙어오는
풀빛 속이나
버들강아지 물오르는 태화천
물소리 속에
아버님 모습을 늘 뵙니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