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


달맞이

淸羅 嚴基昌
보름이 와서
보문산 숲속으로 두둥실 달이 솟았다.

칼바람 들판
깡통 속에 불을 사르며
흥겨운 어깨춤 노랫가락
고향은 어디에도 없고

연을 잃어버려
꿈도 없는
콩나물 같은 내 아이 둘

올해는 헐멋은 가슴에
전설같은
이 애비의 어릴적 보름달을 안아라.

심심풀이로 꽃을 꺾는
네 통통한 손으로 애비의 손 잡고
두엄 냄새 풋풋한 골목이 있어
인정도 있는
아버지의 어릴 적 고향으로 가자.
posted by 청라

省墓


省墓

淸羅 嚴基昌
상여 뒤 따르며 울 때는
솔방울마다 요령 소리로 울어
하늘이 무너지더니
남같이 낯설어진 들국화 한 송이만
반색하는
아버님 무덤에 머리 숙인다.
봉분엔 햇살이 잘 고이고
묘지 옆 참나무 썩은 등걸에
영자 버섯으로 피어난 자식 걱정
‘저승은 늘 춥고 바람 불 텐데
제 염려 거두시지요’
두 번 절하고 올려다 보면
在靑龍 石白虎머리 위로
상현달 하나 나를 지켜 보고
돌아서 가는 자욱마다 채워주는
허전한 저녁 어스름,
아버님 음성…
posted by 청라

아버님前上書


아버님前上書

淸羅 嚴基昌
아버님 목소리 땅에 묻던 날
대밭에서는
하루종일 대순이 돋았습니다.
한 줄금 내린 소나기로
목타던 대지가 젖어
취나물 향기 이내처럼 번지고
꾀꼬리 소리도 윤기 있게 반짝이며
개나리꽃 빈 가지에
꽃을 달고 있었습니다.
초승달 질 무렵
초승달 신고
뒤돌아보며 강 건너가서
착하게 사신 생애 기름으로 태워
이승의 봄 밝히는 등이 되셨나…
철성산 풀빛 짙어오는
풀빛 속이나
버들강아지 물오르는 태화천
물소리 속에
아버님 모습을 늘 뵙니다.
posted by 청라

화장터에서


화장터에서

淸羅 嚴基昌
까마귀 떼들이 요령 소리로
솟아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들이
반역의 창날을 세워
무심한 황혼을 꿰고 있다.
막차도 끊어지고
여기는
구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
무너진 것은 무너진대로
어둠의 저편 나라에 빛난다지만
喪杖처럼 늘어선 대숲을 보며
우리는 쓸쓸하게
꺾인 이름의 생애에 꽃을 뿌린다.
반딧불들이 어둠의 옷고름을 풀면
한 이름은 불타서 달맞이꽃이 되고
달맞이꽃은 시들어
어둠이 된다.
posted by 청라

고향


고향

淸羅 嚴基昌
스산한 가슴이다.
이지러진 조각달처럼
아무도 안아줄 수 없는 고향

섣달 그믐 북녘 바람을 타고
기러기, 기러기,
기러기 떼들이 오고 있다.

가방마다 가득 담아온
도시의 불꽃으로
오늘 저녁 노인들의 창가엔
감빛 꿈이 밝혀질까

굳게 닫아 건 빗장을 풀고
가슴 깊이 묻어둔
고향의 마음을 열까

빈들을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의 기도만
저무는 눈발에 덮여 가고 있다.
posted by 청라

고향


고향

淸羅 嚴基昌
나무들마다 걸치고 있던
옷을 벗으면
더욱 앙상한 마을,

날선 하늘을 이고 있는
홍시감 하나
위태롭게 고향을 지키고 있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많은
버스가 섰다가 동구 밖 돌아가면

풀벌레들은 높은음자리표로
높은음자리표로 울어
빈 골목을 채우고,

저녁 연기 시들은 함석 지붕마다
봉숭아 꽃물처럼 황혼이 번지고 있는

아이들아!
불러도 대답없는
고향은 지금 비어 있다.
posted by 청라

고향


고향

淸羅 嚴基昌
우거진 쑥대풀 사이
봉숭아 환하게 피어 있어도
빈 집은 빈 집이데.

잿간 어귀에
날부러진 괭이 삽 걸려 있어도
빈집은 빈 집이데.

섬돌 위에는
찢어진 고무신 누워 있어도
빈 집은 빈 집이데.

아이가 버리고 간 인형이 하나
인형의 눈 속에
달빛에 가득 들여 놓아도
빈 집은 빈 집이데......

posted by 청라

고향


고향

淸羅 嚴基昌
아이들 웃음소리 떠나간
빈 골목에
노랑나비는 하루종일 심심하다.

검은 머리카락에 앉아
리본이 되어 줄 소녀도 없고

시멘트 담벼락에
신문 조각처럼 펄럭이다
물빛 하늘로 목을 축인다.

자운영골엔 봄이 왔어도
자운영꽃이 피지 않고

꽃가루 한 모금 묻히지 못한
더듬이 끝에
트랙터 소리만 묻어 나고 있다.
posted by 청라

고향


고향

淸羅 嚴基昌
느티나무 아래서
새소리를 듣는다.
장다리골 청솔바람이
상큼한 열무김치 맛으로 불어오면
골목마다 찍혀 빛나는
내 유년의 발자국들
타향의 하늘 날다가
지친 날개 접고 쉬라고
고향의 그늘은 늘 비워져 있다.
흙냄새 품은 친구와
술을 마시면
하늘의 별도 술잔에 내려와
몸을 섞느니.
모깃불 향기로 매캐한 밤
달빛에 닦여지는
남가섭암 목탁 소리 마을을 덮어
잃어버린 웃음
몇 송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다.
posted by 청라

귀향


귀향

淸羅 嚴基昌
잊지 않았는데
한 번 오기 어렵더이다.
회재 마루에 올라서자
고향의 나무들이 만 개의 손을 흔들고
옛집 앞 복사꽃 가지마다
점화하는
호들갑스런 산까치 소리.
황금빛 석양이 머리칼 풀어헤친
산비듬나무 아래 내 여울엔
대전서부터 따라온 낮달이 목욕하고 있다
모자를 벗으며
허리 굽히고 바라보면
말끔히 씻긴 달처럼 내가 서 있고
돌아온 내 손이 빈손이라
친구야
흙묻은 네 손을 맞잡을 수 있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