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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아버지
ᄒᆞ나
아버지 제삿날 저녁 생전의 사진 보니
지금의 내 모습이 거울 속에 비춰있네.
평소에 못마땅하던 것도 어찌 저리 닮았을까
2017, 6. 24
둘
불쌍한 사람 보면 그냥 못 지나가서
동장군 유난하던 정유 겨울 늦은 밤에
추위에 떨던 거지를 집안에 들이시니
2017, 7. 2
세
어머니 가슴에서 형님 뺏어 짊어지고
햇볕 고인 양지쪽에 돌무덤 만들고서
남몰래 쏟은 통곡에 도라지꽃 피었다.
2017. 7. 13
네
육이오 끝 무렵 왼손에 총을 맞아
굽은 손 모진 통증 평생을 살면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 거친 땅을 일구셨지.
2017. 7. 18
다ᄉᆞᆺ
아버지 웃음 속엔 고뇌가 절반이다.
저녁에 돌아와서 환히 웃는 얼굴 뒤엔
세상에 휘둘리다 온 아픔이 녹아있다.
2017, 7. 3
글
고가古家 이야기
그 오래 된 집에
젊은 주인이 들어서면서
오백 년 묵은 향나무는 갈 곳이 없어졌다.
나이테마다 어려 있는 역사의 향기도
세월의 아픔을 감싸 안은 둥치도
톱날 아래 무참히 잘려나갈 운명이 되었다.
새 주인은
옛날 냄새나는 것들 모두 치워버리고
팬지, 데이지, 베고니아로 화사하게 집안을 꾸미겠단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모두 버림받아야 되는 것일까.
향나무 그 옆 꽃밭에 베고니아를 심고
옛날과 지금이 조화롭게 어울리면 안 될까
금방 잘려나갈 줄도 모르고
뒤틀린 손발 끝에 힘차게 새싹을 밀어올리는
향나무를 보며
주인이 바뀔 때마다
하나씩 잘려나가는 옛날의 굵은 줄기들 너머
잔가지처럼 가늘어져만 가는 나라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2017. 5. 17
글
자연법
수달 한 쌍 들랑 달랑
식사를 하고 있다.
극락교 아래 물고기가
한 마리씩 지워진다.
풍경風磬은 아파 우는데
업연業緣 위에 뜬 구름
큰스님 난간에서
허허허 웃고 있다.
불법의 나라에서도
자연법이 우선이지.
나직히 읊조리는 말
나무 아미 타-불
글
그믐달
하늘은
은장도 하나 파랗게 날 세워
무얼 지키고 있나.
지킬 것 하나 없는
지상의 마을
부엉새만 어둠을 운다.
글
봄날
아파트 정원엔 봄꽃이 다 졌는데
태화산 골짜기에 와 보니
봄은 모두 거기에 모여 있었다.
사진에 담아 가 무얼 하려는가.
산은 붓으로 그리지 않아도
마음에 향기로 배어 있는 걸
새 소리 몇 소절에 꽃은 아직 피고 있어서
문득 내 인생의 봄날에
음각으로 도장 찍힌 사람을 생각하며
그냥 산이 되어 보았다.
기다림은
삶의 옷자락에 찍혀지는 무늬 같은 것
비웠다 생각하면 언제나 지우다 만
색연필자국처럼
초록으로 일어서는 당신,
신열처럼 세월의 갈피에
숨어 있다가
고향에 오면 끓어오르는 봄날이여!
글
삼충사三忠祠의 문
궁금하지도 않는가보다
뻐꾸기가 부르는데
굳게 잠겨있는 삼충사 문 밖에서
오월의 연초록 목소리로 두드려 본다.
사람은 바뀌어도 그 자리에 서면
모두가 의자왕이 되더라.
민중들의 목소리는 늘
허공에 흘러가는 바람이더라.
아프고 아픈 것들 철쭉꽃으로
피었다가 지는데
깨져버린 마음처럼
삼충사 문은 열릴 줄 모른다.
글
사월
태화산 골물소리에 송홧가루 날린다.
뻐꾸기 노래에도 노란 물이 들었네.
술잔에 담아 마시네. 내 영혼을 색칠 하네.
다람쥐 한 마리가 갸웃대며 보는 하늘
무엇이 궁금한가 연초록이 짙어지네.
온종일 앉아있으니 내 손 끝에 잎이 피네.
글
오월
아이들 웃음소리가
이팝꽃을 피우고 있다.
리모델링을 한 거리로
도솔산 뻐꾸기 소리
내려오면
주문呪文처럼 조롱조롱 피어나는
황홀한 예감
오래 닫혀있던 그 사람
마음의 창이 열릴까.
2017, 5, 6
『문학사랑』124호(2018년 여름호)
글
이팝꽃 핀 날 아침
이팝꽃 핀 날 아침엔
당신의 창가에 커튼이 내려져도
서러움이 덜할 것 같다.
가로등 일찍 꺼진 거리에
수많은 꽃잎들이 불을 밝히고
안개처럼 흐르는 향기
도솔산 뻐꾸기 소리 한 모금
커피에 타서 마신다.
온몸으로 번져가는 나른한 행복
하루 종일 바람이 불어
꽃이 다 지지 않는 한
닫혀 진 커튼 더 활짝 열리겠지.
아직 잠들었던 작은 봉오리마다
황홀한 예감들이 깨어나고 있다.
글
바람에게
잎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아라.
심어놓고 흔들어대는데
잎 필 겨를이 어디 있으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눈 흘기지 말아라.
뿌리가 다 말라가는데
꽃 피울 정신이 어디 있으랴.
열매 맺지 않는다고
소리치지 말아라.
꽃도 못 피웠는데
열매 맺을 사랑이 남아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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