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보고 있다

누군가 보고 있다

 

 

술에 취해서 가끔은

비 젖은 전봇대에 쉬를 하기도 하고

적색 등 횡단보도를

바람같이 건너기도 했던 젊은 날에는

 

마음속에

하느님을 가득 들여놓고

하지 마라 하지 마라

죄악의 씨앗들을 맷돌로 갈아댔는데

 

누군가 보고 있다

수많은 카메라들이 둥그런 눈을 번득이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양심을 찍어가고 있다.

 

나는 날마다

보이지 않는 섬광에 가슴을 찔리며 산다.

나의 낭만은 피를 흘리고 있다.

 

감시의 풀밭에서

독초는 더 무성히 자라나지만

꽃같이 아름다운 나의 죄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떨면서 산다.

 

하늘이 너무 맑아도

내 마음의 악기들은 아픈 소리를 내고

수많은 시선의 칼날 아래서

나의 평화는 유리처럼 부서진다.

 

아무리 깊이 숨어도

누군가는 보고 있다는 주문에 걸려

어머니의 자장가를 잃어버리고

 

야금야금

작은 죄를 모의하던

설렘도 죽어버렸다.


2016. 4. 22

posted by 청라

사진 한 장

수필/서정 수필 2016. 4. 14. 08:15

사진 한 장

 

 

 막내아우가 카카오 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아우의 대학 졸업식 때 찍은 어머니 사진이었다. 아우의 졸업식 가운에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들으셨다. 무심한 표정 속에서 살풋 미소가 내비친다.

  나는 아우가 참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대학 졸업식에도 틀림없이 오셨을 터인데 졸업식 예복을 입혀 사진을 찍어드릴 생각은 왜 못했던고. 논 열 마지기 남짓의 궁핍한 시골 살림인데도 내 밑 형제들이 줄줄이 대학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이 모두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은혜를 깜빡깜빡 잘도 잊는다. 아우가 보낸 사진을 보면서 나는 한참이나 눈물에 젖어있었다.

  아버지는 인정이 많고 인품도 훌륭하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늘 칭송을 들었지만 생활에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으셨다. 놀음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농사를 지으셨지만, 가을걷이가 끝나면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늘 불안해하고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시다가 어느 날 휙 하고 나가시면 봄이 무르익어 농사철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다.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봄바람보다 흉한 소문이 먼저 집으로 건너왔다.

  “기챙이네 못살게 되었다더라.”

  소문이 건너온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우리를 재워놓고 소리죽여 우셨다. 6남매를 데리고 또 한 해를 보내실 일이 아마 막막하셨을 것이다. 실상 아버지께서 겨우내 지어놓은 빚이란 게 쌀 일곱, 여덟 가마에 불과했지만, 팍팍한 농촌 살림에 그 정도면 충분히 못살게 될 만한 빚이었다. 너그러운 아버지 성품에 딸 때는 개평 팍팍 주고 잃을 때는 고스란히 잃으시며 겨우내 먹고 자고 하였으니 그 정도의 빚은 그래도 가족들을 배려한 최대한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느 핸가는 할아버지 제삿날이 되었는데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겨우내 행방도 알 수 없이 떠도시다가 며칠 전 마을 주막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다.

  “기챙아, 할아버지 제사 지내게 아버지 모셔 와라.”

  나는 밤길이 무서운데도 주막으로 내려갔다. 오래 못 본 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하였다. 아버지께서 마작을 하시는 방문에 대고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지내야 된다고 어머니가 모셔 오래요.”

  한참 있다가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좀 기다려라.”

  30분을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 안에서는 열띤 사람들의 호흡소리만 넘어왔다. 아니, 겨우내 못 보고도 아들이 보고 싶지도 않나. 나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아버지, 어머니가 빨리 오래요.”

  “알았다. 거의 다 됐다.”

  날 선 내 목소리를 느꼈을 터인데도 아버지는 태평하기만 했다. 무엇이 다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한 시간을 또 기다렸다. 동생들은 자다가 쌀밥 좀 먹겠다고 억지로 일어났지만 또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자정이 다 되어가지 않는가. 나는 잔뜩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아버지, 날 새겠어요.”

  문 안에서는 한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딱딱 마작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

  “, 안되겠다. 너희들끼리 그냥 지내라.”

  나는 열불이 나서 문을 열어젖히고 마작 판을 확 뒤집어엎어버리고 싶었다.

  “뭐 저런 아버지가 다 있어. 아버지가 저래도 돼?”

  돌아가는 길에 팔풍쟁이 고개로 치달리는 바람마저도 얄밉게 느껴졌다.

  그렇게 겨울만 되면 대책 없어지는 남편과 한평생을 살아온 어머니였다. 더구나 6.25사변 통에 두 아들을 잃고 평생 가슴에 못 박힌 채로 살아오신 어머니였다. 14살 된 형을 묻었다는 바위 어귀에 가실 때면 어머니는 넘어지면서도 눈을 감고 걸으셨다. 자식을 먼저 묻은 모진 운명에 대해 외면하고 싶으셨으리라. 전쟁이 끝나자마자 태어나서 집안의 어둠을 말끔히 씻어준 아들이, 더구나 초등학교 6년 동안 반장에 1등을 도맡아 한 아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예뻤겠는가. 그런 아들을 읍내 중학교에 보낼 수 없음을 늘 가슴아파하던 어머니였다.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가서 검정고시에 합격을 해도 고등학교에 입학시켜줄 엄두도 못 내시던 어머니. 나는 내 신세가 하도 서러워서 부모님과 같이 밭을 매다가 호미를 집어던지고 꺼이꺼이 울었다. 장학금을 준다는 고등학교도 있으니 방 하나만 얻어달라고 떼를 썼다. 밭가의 뽕나무 가지를 꺾어다 종아리를 치시던 어머니도 나를 붙잡고 우셨다.

  나는 어머니 생전에 소리 내어 웃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모습이 웃는 모습인지도 알 수가 없다. 동생의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에 나타난 그 오묘한 표정이 웃음인지 아닌지도 나는 파악할 수 없어서 그냥 한참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이젠 웃으셔도 돼요. 그 아픈 세월에 아들을 세 명이나 석사모 씌우셨으니 어머니는 박사모를 쓰셔도 충분하다니까요.”


2016. 3. 13

문학사랑2016년 여름호(116)

<한밭수필>2016(8

posted by 청라

여름날 아침

여름날 아침

 

 

풀잎 끝에 대롱거리는

이슬을 보다

나는 이슬에 갇혔었지.

 

하늘은 왜

투명한 목소리로 거기 박혀있을까

 

모란 꽃잎 위에 속살거리는

별들의 이야기 방울은

왜 수박 속처럼 맛이 있을까

 

구슬 빛에 홀려서

밤새도록 사연 깊게 울어대던

두견새 울음을 꿰어

영롱한 목걸이 하나 만들고 싶었지.

 

툭 하고 떨어져 꿈이 깨어질까봐

불어오는 실바람도

체로 치고 싶었지.

 

세상이 모두 신기하고

찬란하게 보이던

내 손자만한 그런 날 여름 아침에


한국문학인2016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