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點에서

原點에서

 

 

한 알의 죽음 곁에서

푸른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

한 알의

또 다른 비둘기가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비둘기의 날개가 햇살의 鍵盤을 두드리며

높은 옥타브로 치솟던 하늘 밑에서

하나의 알은

처절한 침묵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과 끝이

몽롱한 안개처럼 누워있는

원점에서의 해후

빛나는 履歷들도 어둠이 된 의 바다에서

부리를 닦는다.

입동의 하늘 끝 눈발이 내리고…….

posted by 청라

석불

석불

 

 

머리가 없다고

자비慈悲마저 떠난 것은 아니다.


반쪽만 남은 몸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합장合掌을 받고 있으니

육신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다.

 

떨어져 나간 어깨

움푹 파인 가슴에도

떼어 줄 것 아직 남아있어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온 몸 다 공양供養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한 조각씩 부스러질 뿐이다.

 

2015. 7. 23

<대전예술> 2015년 12월호

<불교공뉴스> 201616일자

posted by 청라

눈길

수필/서정 수필 2015. 7. 23. 16:04

눈길

 

 

  이른 매화꽃이 핀 지도 한참 지났는데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개화를 준비하던 꽃가지마다 탐스럽게 눈꽃을 매달았다. 어디를 바라봐도 온통 정결한 흰 색이다. 아버지 기일이라 연미산 고개를 오르면서 문득 어떤 눈길이 떠올랐다.

  간경화로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진 아버지는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고 우기셔서 억지로 퇴원을 하셨다. 공주에서 택시로 집엘 가던 그 때도 눈이 많이 내렸었다.

  “다시 이 길을 또 올지 모르겠네.”

  애잔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그 때의 그 말씀이 이 길의 마지막이셨다. 그 후로 아버지는 이 길을 다시 오지 못하셨다.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시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담아두시려고 사방을 둘러보시던 그 때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추억이 얽힌 눈길이라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던가,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 전날이 되었는데 눈이 엄청 내렸다. “천산 조비절이요(千山鳥飛絶)이요 만경인종멸(萬徑人蹤滅)”이라 했던 유종원의 강설(降雪)이 떠오르는 날씨였다. 교통이 모두 두절되어서 오십 리가 넘는 공주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하루 결석하고 내일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께서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서셨다. 나보다 서른네 살이 많으셨으니 당시에 쉰세 살이셨다. 큰 병이라도 나시면 큰일이기에 내일 가겠다고 물러섰지만 사나이가 한 번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가야한다고 앞장서셨다.

  회재고개를 올라가는데 눈보라 칼바람이 몰아쳤다. 코도 시리고 손가락, 발가락 끝이 모두 아리고 아팠다. 백분의 일도 못 왔는데 그만 들어가시라고 간청해도 대답도 않으시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아버지의 등엔 내가 먹을 쌀 한 말이 메어져 있었다.

  우성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나는 비탈진 도로에서 미끄러져 같이 붙잡고 넘어졌다. 눈 밑엔 자갈이 깔려서 무릎이 몹시 아팠다. 아버지도 아프셨겠지만 내 옷을 털어주시고 겉옷을 벗어 내 등에 입혀주셨다. 나는 눈물이 났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자식들에겐 엄격한 아버지였다. 노름을 좋아해서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 늘 원망하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극한사항에 도달하자 자식을 가진 아버지는 결국 아버지였다.

  전막 가까이서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자장면을 먹었다. 무척 시장하실 텐데도 몇 젓가락 내 그릇에 덜어놓으셨다. 나는 내 눈에도 눈물이 많음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걸핏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걸었던 눈길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끝없이 나에게 묻는다. 눈보라 칼바람 속에서 오십 리 넘는 눈길을 아들을 위해 선뜻 따라나설 수 있겠느냐고.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지극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겠느냐고.


<한밭수필> 제7호(2015년)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