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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歲寒圖에 사는 사내
그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사방으로 열려서 신바람 난 바람이
울 밖 같은 울안을
한바탕 휘젓다 가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 집 사내는
청청한 외로움을 가꾸기 위해
덩굴장미 한 그루 심지 않았다.
덩그렇게 세워 놓은 네그루의 소나무에도
새 한 마리 불러오지 않았다.
제대로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평생을 마음 밭에 겨울만 들여놓고
뜰 밖을 둘러 친 울타리 대신
서릿발 같은 기상 온 몸으로 반짝이며
아예 방문을 지워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다.
2015. 4. 17
<대전문학>68호(2015년 여름호)
글
<기행문>
솔향기 길에서 봄을 마시다
노은동 수산시장 주차장에서 홍 선생 차로 갈아타고 대전을 출발한 것은 봄꽃이 만발했던 4월 8일 오전 7시 30분. 하늘은 큰비라도 쏟아낼 듯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전주의 향란 씨 정년퇴임 기념으로 태안 천삼백 리 절경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솔향기길’로 초대를 했는데 비 때문에 올라가보지도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여왕처럼 위해줘야 해”
문득 선영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엄숙하게 한담.
스쳐가는 차창 밖의 봄꽃들에 정신이 팔려있는 명중이, 덕규, 선영이를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들이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만족하는 것은 교사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대전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대전에 저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몸담아온 교단에서 물러나 허탈해하고 있을 친구를 초대해주고, 그런 친구를 여왕처럼 위해주자는 웃기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순진한 친구들. 내 남은 인생에 저 친구들과 함께라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만대항으로 들어서며 하늘이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개었다. 푸른 바다 위로 쏟아지는 4월의 은빛 햇살, 떼 지어 나르는 갈매기 소리, 짭조름한 바다 냄새. 그래, ‘솔향기길’에 간다고 그렇게 가슴이 뛰었던 것은 내 잠재적 의식 속에 4월 바다의 몽환적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풋풋하게 안겨오는 바다의 흐트러진 몸짓 위에 봄은 이미 와 있었다.
‘만대수산’ 앞에 주차를 하고 ‘솔향기길’ 안내판 뒤 산길을 오른다. ‘솔향기길’은 태안의 상징인 ‘바다’와 ‘소나무’를 테마로 하여 태안군에서 조성한 생태 탐방로인데 현재 5개 코스 51,4km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길은 2007년 12월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당시 자원봉사자들의 방제작업을 위해 만든 작은 길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자원봉사자들의 편의를 위해 이곳 이원면민회 회장 차윤천 선생이 길을 닦기 시작했다고 한다. 방제작업이 끝난 이후 아름다운 해안경관을 따라 산책로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태안군의 협조를 받아 오늘의 이 길을 완성했단다. 우리가 오늘 걸어야 할 길은 다섯 개 코스 중 제일 아름다운 제1 코스 만대항부터 꾸지나무골 해수욕장까지 10,2km. 생업까지 젖혀놓고 이 길에 매달렸을 한 사람의 땀과 의지에 머리가 숙여진다.
등성이로 올라가며 보니 온산이 진달래꽃으로 불이 붙었다. 연분홍으로 혹은 진주홍으로 풀섶마다 바위틈마다 일어난 불길이 산봉우리 가까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꽃 사이로 들어서면 온몸이 불길에 타오를 것만 같다. 산길을 오르는 것도 잊고 모두들 카메라에 이 화려한 봄의 향연을 담아놓느라 정신들이 없다. 왼쪽으로는 가로림만의 풍광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론 중국까지 이어진 서해바다. 봄은 관능적인 몸짓으로 여기 와서 벌써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르기만 하는 길이 힘들어서일까, 아래로 치달린 길이 백사장으로 이어져 있다. 해안가의 집 몇 채가 옹기종기 정답다. 여기가 큰구매수동. 들어왔다 나간 물 자국 선명한 백사장 끝 작은구매수동 쪽으로 삼형제바위가 온몸을 드러내고 있다. 같은 터전 안에 있어서 보는 장소에 따라 하나로도 보이고 둘로도 보이고 셋으로도 보이는 이 바위는 한집안에 살을 같이하는 삼형제가 서로 의좋게 지내면서 잘못된 것은 숨겨주고 잘된 것은 드러나게 하는 현상과 같다고 하여 명명되었다 한다. 가족 간의 정이 이익 앞에 산산이 부서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발길 한없이 무겁다.
이름도 정다운 붉은앙뗑이, 새막금쉼터, 큰노루금 등을 지나 당봉전망대에 다다랐다. 섬처럼 양편의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소나무 길, 바위들 절묘하게 선 절벽 끝엔 한없는 바다. 날은 활짝 개어 눈을 크게 뜨면 바다 너머 중국이 보일 듯도 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솔향기가 가득 온몸으로 들어온다. 이러다가 온통 솔향기에 절어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또 어떠리. 속진에 절은 몸을 솔향기로 목욕한다면 이보다 더 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매서운 기세는 가셨지만 아직도 드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려가니 거기 餘섬이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함초롬히 서 있었다. 해안에서 좀 떨어져 둥그렇게 솟은 모습이 신기하다. 옛날 선인들이 이 섬 이름을 지을 때 이 섬이 유일하게 하나만 남게 될 것을 예견하고 남을 여(餘)자를 붙여서 餘섬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북쪽 가마봉 쪽에서 보면 아름다운 여인상으로도 보이고 서쪽 끝부분 우뚝 솟은 바위가 마치 남자의 신(腎)처럼 보인다고도 하는데 눈썰미가 없어서 그런지 도통 그런 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오묘하게도 절벽 이어진 바닷가에 어찌 또 저런 섬을 지어놓았을까? 조물주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여섬을 지나 다시 등성이로 올라가는데 앞서가던 향란 씨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길가에서 뱀이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단다. 다 늙은 할머니 뭐가 매력적이라고 봐. 콧방귀를 뀌며 달려가 보니 능구렁이 한 마리 진달래꽃 사이로 황급히 몸을 숨긴다. 문득 서정주 시인의 ‘화사(花蛇)’가 생각났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아름다운 배암……/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뱀을 보며 시를 읊조리다 보니 친구들은 벌써 산모롱이를 돌아갔다. 봉우리를 넘어가보니 그림같이 아름다운 해변에 펜션들이 줄지어있다. 시간이 있다면 아름다운 봄의 서정이 넘치는 펜션에서 며칠 쯤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펜션촌에서 점심을 먹고 찾아간 곳이 용난굴, 해변 절벽 위에 용이 빠져나온 자국인 듯 동굴이 덩그렇다. 동굴 천장엔 안에서부터 밖까지 하얀 바위가 길게 뻗어있는데, 마치 한 마리 용이 굴을 빠져나오다가 바위로 굳은 듯하다. 용난굴 앞바다에서 일어난 파도소리는 용난굴을 채웠다가 비워지고 화석으로 굳은 용의 몸을 쓰다듬고 사라진다. 곰보처럼 고동들로 덮여있는 바위와 절벽에 서있는 해묵은 소나무들. 그럴 듯한 전설 하나 여기 산다고 고개 저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서 수줍게 피어난 하얀 제비꽃을 보았다. 진달래 화려한 자태와 이웃해있어 아무도 눈여겨보는 이 없을 것 같다. 젊었을 때 안보이던 꽃이 늙으니까 보이는 것일까. 이제 내려가면 솔향기 풍기는 봄의 향취를 한참은 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정의 마지막 봉우리에서 나는 진달래꽃 향기를 마시고, 봄 바다의 파돗소리를 마시고, 봄 물기 싱싱한 솔향기를 마시고, ‘솔향기길’의 청아한 봄을 몽땅 마셔버렸다.
2015년 4월 11일
<문학사랑> 2015년 여름호(112호)
글
<청라의 사색 채널>
나를 따르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1974년 2월 말 ROTC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 보병학교에 입소하였다. 소정리역에서부터 구보를 하여 훤히 동트는 새벽 상무대에 도착했을 때 연병장에 새까맣게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불길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나를 감동하게 했던 것은 보병학교에 걸려있던 부대 구호였다. “나를 따르라!” 이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도 이 구호를 썼는데 이것은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앞장선다는 뜻이며, 가장 위험한 선봉에 지휘관이 모범을 보인다는 뜻이다. 이 구호 속에는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부하들보다 먼저 튀어나가는 용기와 부하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부하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자신에 대한 강한 신뢰가 담겨있다.
보병학교에 도착했던 첫날 떠오르는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전율케 했던 이 구호는 내 평생 삶의 구호가 되었으며, 소대장을 할 때도, 아버지가 되었을 때도, 교직자로 교단에 서 있을 때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소대장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교사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항시 아쉬워하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은 어째서 이러한 구호 하나 마음속에 담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 전 김영란 법(부정청탁 방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이 통과되었을 때 나는 한없는 기쁨 속에서도 씁쓸한 마음 한 자락 들고 일어남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국민들 누구나가 생각해도 가장 큰 부정의 소지가 있는 정치가, 국회의원에게는 이 법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었다. 관민유착의 고리를 끊는다는 관피아 방지법에서 관의 핵심이 되는 사람들의 목에 줄이 없는데 이 법이 무슨 큰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전쟁터에서 자신의 몸은 뒤로 빼면서 부하들에게만 “진격 앞으로!” 한다면 누가 적진을 향해 돌진하겠는가.
이제 국회의원의 국민 지지도가 17%에서 까딱거리게 되었음을 인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우리 국회에서 합의라는 민주주의의 꽃은 찾아볼 수 없다. 자신들의 이익과 당리당략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하고, 자신들이 요구하는 정책이 관철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강하게 반대하던 사안들도 자신들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교환조건으로 찬성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은 장외투쟁을 하다가도 국회의원 봉급 인상이나 연금 책정 같은 법안은 모두 참여하여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정치가,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나 당의 이익보다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김영란 법 같은 지뢰밭도 솔선해서 앞장서고, 자식들 군대도 앞장서서 보내야 한다. 여당 대표는 차기 대선주자 같은 것 인식하지 말고 대통령이 옳게 국정을 꾸려가도록 그림자처럼 도와줘야 하고, 야당 대표는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국가와 국민에 이익이 되는 일에는 박수쳐주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위험한 곳에 자신이 앞장섰을 때, 큰 이익을 양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를 따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목소리가 우렁찰 때 국민이 의심 없이 믿어주고 밀어주며 뒤를 따르는 것이다.
<금강일보> 2015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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