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마을

 

눈 내리는 마을

세상으로 나가는 문들은

닫혀 있었다.

흰 산도라지 꽃 몽롱한 산자락마다

마지막 푸른 목청이 덮이고,

강물은 더 깊은 울음으로 우는데

솔가지 부러지는 산울림 끝에 심지 하나 박고

촛불을 켠다.

살갗마다 일어서는 빛이랑, 외로움이

붉은 포도주 한 잔에 녹아나고,

산마을 밖 두고 온 그리움 눈 속에 묻으면서

참나무 울타리 잎새 떨며 우는 바람에

아우성치는 세간의 정들 먼지처럼 날리리라.

칭얼대며 유리창 두드리는

송이 눈에

어제 일들 깨끗이 털어버리고,

혼자 마시는 술잔 가득

아직도 남아 있는 얼굴 목구멍 속에 구겨 넣어도

잠깐 취기처럼 아득한 세사의 뿌리들이

덮어도 덮어도 지울 수 없는 댓잎으로

돋아나는데

아무도 넘어오지 않는 회재 고개 너머로

오늘 잠시 떼어놓은 이름표를 달고

내일은 또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

 



산나리꽃


때로는

혼자일 때가

더 외롭지 않을 수도 있다.


닿을 수 없던 한 뼘만큼의 눈물

꽃술 속에 감춰두고


민들레 꽃씨처럼 그리움의

날개를 날려

한 송이 수줍은

산나리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바람이 밟고 가는 나뭇잎 소리에

가슴 설레며

사랑하는 마음

몰래 피었다가 몰래 떨어지는

산나리꽃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posted by 청라

솔처럼 사오시라

 


訟詩



솔처럼 사오시라




산처럼 커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러워

쉽게 노하지 않는 사람


한 시대를 밝히던 횃불을 끄고

四十年 넘게 걸어오신

빛나는 발자취 돌아보는 뒷모습에

은은한 난초향이 풍겨옵니다


님이여!

당신이 첫발을 딛으시던

민족의 새벽은 너무도 춥고 어두웠습니다.

황량한 역사의 들에

묘목을 심고

풍설 속에 지성으로 가꾸신 당신의 손이

삼천리 강산 곳곳마다

초록빛 광휘 찬란한 한낮을 빚으셨습니다.


잡을 수 없는 거리만큼

이제

물러나시는 당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는 당신,

솔처럼 늘 푸르게 사오시며


무사히 맺으시는 작은 福

꽃으로 피워

가시는 발걸음마다 큰 福으로 열리소서.


<權義石 校長先生님 停年 退任式에 붙여>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