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목


인형의 목

淸羅 嚴基昌
혼자 걷는 길에만, 너는
너의 내면에서 나의
내면으로 건너 온다
바둑돌 모양 살은 깎이고
흑백의 뼈만 남은
그 말 한 마디만 가지고 건너온다.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은 슬픔이란다.>
세월이 갈수록 윤기 도는
너의 허연 목뼈.
살아 움직이나보다 너의
목뼈는
내가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면
떨어져 나간 머리 대신으로
조용히 목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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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동 오후


은행동 오후

淸羅 嚴基昌
내가 빌딩숲 사이에서
싸리꽃으로 핀다면
피는 거지.
쓸어내도 쓸어내도 마르지 않는
저 소음의 한끝을 잘라내고
내 고향 太華山
산 자장가 소리 뿌릴 수 있다면 뿌리는 거지.
아무리 질긴 뿌리라도, 내 사랑
아스팔트 바닥 위에선 싹이 틀 수 없다는
친구여, 믿게나
오늘 오후에도 지하도 입구에서 만나는
빈 접시 하나
흔들리지 않는 맹인의 눈빛
향기를 하나 가득 담아 주겠네.
posted by 청라

인형의 노래


인형의 노래

淸羅 嚴基昌
새벽 안개 속에 버려진 인형 하나가
必死의 긴 밤을 지새우고 있다.
파란 칼날처럼 날세운 그믐달
가슴에 걸고
새빨간 알몸으로 불타고 있다.
소리 없는 울음 하나가
한 개씩의 별을 끄면서
하늘은 쪽빛으로 맑게 풀리고
아침의 발자국 소리 가까워 온다.
어둠의 깊은 층계 밑에서
가슴 울리는 소리 들리는가
한 파람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또 한 개씩 바램의 불을 켜면서
이리 오라고 이리 오라고
전신으로 흔드는 인형의 작은 손바닥들이
아이들 새벽 꿈밭에 만장처럼 펄럭인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