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 매듭을 푸는 소리 -서편제를 읽고

독후감 2007. 4. 13. 09:00

<독후감>

한(恨)의 매듭을 푸는 소리
‘서편제’를 읽고


淸羅 嚴基昌
 한(恨)이란 것이 과연 인간의 마음을 모질게만 만드는 것일까? 모질게 만들어 세상을 저주하고, 천둥과 벼락으로 발톱을 세워 광명의 땅 곳곳마다 어둠을 심는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것일까?

 나는 오래 전부터 원한으로 악마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러한 의문에 잠겨 있었다. 한(恨)조차도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시킨 ‘소월 시’를 보며, 한이란 것이 결코 우리의 삶을 거칠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슴푸레 느낄 수 있었으며, ‘서편제’를 탐독하고 나서야 한의 껍질을 벗기고 보면 질기고 따스한 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가 한(恨)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해학과 익살로 승화시켜 한(恨) 자체를 즐겼던 우리 조상의 숨결이 ‘서편제’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통한 자줏빛 낭만으로 승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의붓아비로 인해 하나뿐인 어머니를 빼앗긴 소년. 그 원한을 갚기 위해 북 잡이 노릇을 하며 의붓아비를 살해할 목적으로 유랑생활을 하던 소년. 은밀한 살의가 움터 오르다가도 의붓아비의 천연스럽고 유장한 노랫가락 소리만 들으면 도무지 힘을 쓸 수 없었던 이 소년은 애초부터 소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의붓아비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원을 풀 기회를 주었음에도 살해할 뜻을 버리고 의붓아비와 어린 누이의 곁에서 -사람을 홀리는 노랫가락 곁에서 자취를 숨기고 떠난 것일 게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아비를 죽이고 싶어 한 부질없는 자신의 원한을 후회하고, 아비와 누이를 버리고 떠난 자신의 비정을 속죄하며 누이를 찾아 남도 땅을 헤맬 때, 나도 남도 땅 산천 골골 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 속에 묻혀 이 사내와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모처럼의 휴일에 영화감상을 선택하지 않고 책을 펴든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만족해했다. 장장 마다 펼쳐진 문장의 유려함도 놀랍거니와 서너 줄 읽고 강 자락 휘어진 남도의 어느 산길이나 벌판과 바다를 상상해 보고, 눈 먼 여인의 한 맺힌 노랫가락 소리를 귀보다 훨씬 깊은 마음으로 듣는 재미를 어찌 영화가 따라올 수 있겠는가. 보성 땅 어느 공동묘지 옆 주막에서 여인의 애절한 소리에 맞춰 북 장단을 칠적에, 오랫동안 잊으려 애를 썼으나 결국은 버릴 수 없었던 소리의 얼굴을 다시 대면한 사내의 운명. 이 운명에 대한 깨달음이 혼이 담긴 소리를 가꾸기 위해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부은 의붓아비의 집착마저 이해하게 된 원인이 아닐까. 한(恨)이란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는 사내의 말처럼, 아비의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눈먼 여인은 일찍부터 아비를 용서하고 그 용서로 인해 한이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소리무덤 속에 아비의 소리를 묻고 소리의 빛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던 여인. 가끔 마루 끝 볕발 속으로 나와 앉아 보이지 않는 눈길을 들판 건너 먼 산허리께로 내던진 채 끊임없이 무엇을 기다리던 여인. 이 여인이 기다리던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장단을 맞춰주던 자기 소리의 한 쪽, 바로 어느 산굽이에서 용변을 보러가듯 스르르 없어진 추억 속의 오라비가 아니었을까. 탐진강 물굽이 휘돌아 흐르던 장흥 어느 주막에서 이 오누이가 서로 만나던 저녁 나는 인간적 호기심으로 가슴을 설레었다. 서로를 확인하고는 오열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 것인가? 아니면 사내의 가슴속에 뜨거운 용암으로 가라앉았던 살의가 다시 이해와 용서라는 얇은 벽을 태워 이빨을 드러낼 것인가? 그러나 사내는 북채를 잡고 여인은 소리를 하며 동틀 무렵까지 지내다가 싱겁게 헤어지고 말아다. 여인은 소리로 울며 장단을 통해 사내가 오라비임을 확인하였고, 오라비는 여인이 누이임을 알면서 누이의 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햇덩이 같이 일어나는 살기를 누르며 사내 쪽에서 몸을 피해 도망친 것이다. 누이의 한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몰래 떠나간 오라비나, 제 소리를 아껴주는 오라비의 한을 제 것과 한가지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이나 속세의 때에 전 나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정신적 경지에 있는 듯 느껴졌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행로에서 한과 만난다. 한의 매듭에 옭혀 허우적거리다가 인생을 불행하게 끝내는 사람도 있고, 그 매듭을 깨끗하게 풀어내어 사랑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한의 매듭을 풀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용서하는 일이다. 남을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하고, 그리고 세상사 모든 것을 용서하는 일이 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편제’를 덮고 아련한 책 속의 향기에 취한 이 밤, 나는 문득 남도 행 열차를 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날의 주막은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문명에 덮여 흔적조차 찾기 어렵겠지만, 뚝심 있게 남도 가락을 지키며 그 소리를 통해 한의 매듭을 풀던 여인을, 그 사내를 남도 땅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을 듯도 싶다.    


posted by 청라

죽음의 의미

수필/서정 수필 2007. 4. 12. 09:00

죽음의 의미

淸羅 嚴基昌
 내가 군대에서 막 제대하여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연탄가스로 죽었다. 한여름내 등 밑을 적셔왔던 습기를 없앤다고 연탄을 피워놓고 잠든 사이에 죽음의 신은 그 젊은 영혼을 사정없이 끌고 가 버렸다. 팔팔 뛰던 사람이 밤사이에 웃지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먹지도 못하고, 나를 보아도 반갑다 말 한 마디 못하는 한 덩어리 굳은 물체로 누워있는 것을 보고, 나는 얼마 동안 비감에 젖어있었다.

 그날 오후 공주 근처의 화장터에서 친구를 아주 보냈다. 다정했던 말들도 친근했던 미소도 모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지만 진달래꽃은 그냥 무심히 피어났고, 새들은 그냥 울고 있었다. 친구들은 무심히 흩어졌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 영혼은 곧 잊혀 질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아 숨 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비정을 느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망자의 혼을 위로하듯 까마귀들이 울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까마귀 떼들이 오령 소리로
솟아오른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들이
반역의 창날을 세워
무심한 황혼을 꿰고 있다.
막차도 끊어지고
여기는
구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
무너진 것은 무너진대로
어둠의 저편 나라에 빛난다지만
喪杖처럼 늘어선 대숲을 보며
우리는 쓸쓸하게
꺾인 이름의 생애에 꽃을 뿌린다.
반딧불들이 어둠의 옷고름을 풀면
한 이름은 불타서 달맞이꽃이 되고
달맞이꽃은 시들어
어둠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죽음 가까이 간 적이 있었다. 군 복무 당시 나는 한 1년간 광주에서 근무했었다. 그 때만 해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자신만만하던 시대였다. 수류탄 사고로 부대원이 죽었을 때, 그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시체를 보고도 나는 죽음과 거리가 먼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광주는 젊은 사람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부대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나는 충장로로, 사직공원으로 할 일 없이 방황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낯선 아가씨들에게 농도 잘 걸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구 퍼먹고 열두 시가 넘은 광주 거리를 고성방가하며 돌아온 적도 있다.

 죽음의 신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날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두고 술렁대는 광주 거리를 열한 시 가까이 쏘다니다가 술이 얼큰하게 취한 채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들뜬 거리의 정취가 핏속에 남아, 나의 하숙방,  나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책을 읽으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 한 시경에 가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떴다. 누군가가 딱딱한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 목을 찌르고, 가슴은 뻐개지는 듯 답답했으며, 흐르던 피가 멈춰 있는 듯한 환각 속에 빠져 있었다. 눈 뜨고 처음 바라보던 창 너머 고층 건물의 불빛. 아! 나는 지금까지도 그 흐릿한 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간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낯익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꿈이겠지. 지독한 악몽이구나. 결박 지워진 나의 손, 잘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 나는 악몽 속에서 헤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한참 후에 의사가 와서 나의 손을 풀어주었다. 점점 정신이 들자, 나는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압산소통이 커다랗게 나를 위압하듯 놓여있었으며, 내가 얼마동안 그 통속의 손님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퇴원한 후에도 나는 근 한 달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핏속에 남아있는 일산화탄소의 독소에 의한 피로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결코 나도 죽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참으로 많은 죽음들을 보았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형님 내외도 돌아가시고, 누님도 죽고…….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아직도 죽음이 나와 퍽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의의 손님에 대비하여 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결코 나의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posted by 청라

가슴으로 사랑하기

수필/교단일기 2007. 4. 11. 09:00

가슴으로 사랑하기

淸羅 嚴基昌
 상담실에 근무하면서 삶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학년 교실을 순찰하고, 저녁 늦게까지 남아서 학생들의 자습을 감독하던 학년부장 시절의 일들은 이제 필요 없어졌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대전에 온 이후의 교직생활은 참으로 분주한 나날이었다. 22년 동안 3학년 담임 11년, 3학년 부장 3년, 1, 2학년 부장 2년 등 16년을 일찍 퇴근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그렇게 전깃불 아래서 태워 날려 버렸다. 분주한 만큼 나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얻은 여유 있는 시간에 나는 철저하게 자아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4월에 있었던 일만 해도 내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김 선생이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고 하길래 궁금한 마음으로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중간고사 일 중간에 휴일이 이틀 끼어 있다고 나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올려놓았다. 교직에 30년 넘게 몸담아 있었지만 이런 욕은 처음 들어보는 까닭에 참으로 황당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학사일정은 내가 짜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고사 일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데 왜 나를 향해 욕을 했을까? 평소에 나를 싫어하던 놈이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원망스럽고 미워졌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고,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방학 중에도 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일찍 오는 학생들이 교무실에 들어 있는 교실 열쇠를 못 꺼낼까 걱정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신새벽에 출근하였다. 학교를 떠나 있으면 늘 아이들 걱정을 하였으며, 이런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 알았었다. 아이들에게도 나의 이런 마음이 전달되었다 생각했고, 나는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는 존경받는 교사일 것이라고 착각을 하였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사랑하였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고,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랑하는 체했던 것이 아닐까. 예쁜 아이는 예뻐하고, 미운 아이는 그냥 미워했었던 것 같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다가가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교사는 머리로만 아이들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먼저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이들을 진정 감동시키고 바르게 자라는 밑거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