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水圖


山水圖

淸羅 嚴基昌
꾀고리 울음소리가
개나리꽃 가지에 불을 붙이고 있다.
햇살이 양각으로 박아 놓은 老翁의 낚시 끝에는
청청한 산그림자가 걸려 있고
누군가 넘어 오라는
아스라한 고갯길 따라
저녁 연기로 골골이 잦아드는
저녁 골안개.
버들강아지 줄기로 서서
조롱조롱 열린 귀에는
온종일 골물 소리만 들려오고
투명하게 벗어 오히려
속 깊은
하늘 한복판에
예닐곱살 소녀의 투정처럼 피어난
맨드라미만한 구름 한 송이
posted by 청라

황혼 무렵

시/제3시집-춤바위 2007. 4. 19. 19:13

황혼 무렵

淸羅 嚴基昌
물총새의 눈동자가
돌의 적막(寂寞)을 깔고 앉아서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
노을 속에서 물고기의 비늘들이
더욱 빛나고 있다.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
숨을 죽이고
온 몸 털 세워 바라보는 저
바위의 응시(凝視).

물총새의 부리 끝에
반짝
물비늘이 일렁인다.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

그 어둠마저도 아름다운 황혼 무렵에…….

posted by 청라

한의 매듭을 푸는 소리 -서편제를 읽고

독후감 2007. 4. 13. 09:00

<독후감>

한(恨)의 매듭을 푸는 소리
‘서편제’를 읽고


淸羅 嚴基昌
 한(恨)이란 것이 과연 인간의 마음을 모질게만 만드는 것일까? 모질게 만들어 세상을 저주하고, 천둥과 벼락으로 발톱을 세워 광명의 땅 곳곳마다 어둠을 심는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것일까?

 나는 오래 전부터 원한으로 악마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러한 의문에 잠겨 있었다. 한(恨)조차도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시킨 ‘소월 시’를 보며, 한이란 것이 결코 우리의 삶을 거칠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슴푸레 느낄 수 있었으며, ‘서편제’를 탐독하고 나서야 한의 껍질을 벗기고 보면 질기고 따스한 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가 한(恨)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해학과 익살로 승화시켜 한(恨) 자체를 즐겼던 우리 조상의 숨결이 ‘서편제’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통한 자줏빛 낭만으로 승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의붓아비로 인해 하나뿐인 어머니를 빼앗긴 소년. 그 원한을 갚기 위해 북 잡이 노릇을 하며 의붓아비를 살해할 목적으로 유랑생활을 하던 소년. 은밀한 살의가 움터 오르다가도 의붓아비의 천연스럽고 유장한 노랫가락 소리만 들으면 도무지 힘을 쓸 수 없었던 이 소년은 애초부터 소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의붓아비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원을 풀 기회를 주었음에도 살해할 뜻을 버리고 의붓아비와 어린 누이의 곁에서 -사람을 홀리는 노랫가락 곁에서 자취를 숨기고 떠난 것일 게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아비를 죽이고 싶어 한 부질없는 자신의 원한을 후회하고, 아비와 누이를 버리고 떠난 자신의 비정을 속죄하며 누이를 찾아 남도 땅을 헤맬 때, 나도 남도 땅 산천 골골 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 속에 묻혀 이 사내와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모처럼의 휴일에 영화감상을 선택하지 않고 책을 펴든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만족해했다. 장장 마다 펼쳐진 문장의 유려함도 놀랍거니와 서너 줄 읽고 강 자락 휘어진 남도의 어느 산길이나 벌판과 바다를 상상해 보고, 눈 먼 여인의 한 맺힌 노랫가락 소리를 귀보다 훨씬 깊은 마음으로 듣는 재미를 어찌 영화가 따라올 수 있겠는가. 보성 땅 어느 공동묘지 옆 주막에서 여인의 애절한 소리에 맞춰 북 장단을 칠적에, 오랫동안 잊으려 애를 썼으나 결국은 버릴 수 없었던 소리의 얼굴을 다시 대면한 사내의 운명. 이 운명에 대한 깨달음이 혼이 담긴 소리를 가꾸기 위해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부은 의붓아비의 집착마저 이해하게 된 원인이 아닐까. 한(恨)이란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는 사내의 말처럼, 아비의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눈먼 여인은 일찍부터 아비를 용서하고 그 용서로 인해 한이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소리무덤 속에 아비의 소리를 묻고 소리의 빛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던 여인. 가끔 마루 끝 볕발 속으로 나와 앉아 보이지 않는 눈길을 들판 건너 먼 산허리께로 내던진 채 끊임없이 무엇을 기다리던 여인. 이 여인이 기다리던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장단을 맞춰주던 자기 소리의 한 쪽, 바로 어느 산굽이에서 용변을 보러가듯 스르르 없어진 추억 속의 오라비가 아니었을까. 탐진강 물굽이 휘돌아 흐르던 장흥 어느 주막에서 이 오누이가 서로 만나던 저녁 나는 인간적 호기심으로 가슴을 설레었다. 서로를 확인하고는 오열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 것인가? 아니면 사내의 가슴속에 뜨거운 용암으로 가라앉았던 살의가 다시 이해와 용서라는 얇은 벽을 태워 이빨을 드러낼 것인가? 그러나 사내는 북채를 잡고 여인은 소리를 하며 동틀 무렵까지 지내다가 싱겁게 헤어지고 말아다. 여인은 소리로 울며 장단을 통해 사내가 오라비임을 확인하였고, 오라비는 여인이 누이임을 알면서 누이의 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햇덩이 같이 일어나는 살기를 누르며 사내 쪽에서 몸을 피해 도망친 것이다. 누이의 한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몰래 떠나간 오라비나, 제 소리를 아껴주는 오라비의 한을 제 것과 한가지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이나 속세의 때에 전 나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정신적 경지에 있는 듯 느껴졌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행로에서 한과 만난다. 한의 매듭에 옭혀 허우적거리다가 인생을 불행하게 끝내는 사람도 있고, 그 매듭을 깨끗하게 풀어내어 사랑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한의 매듭을 풀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용서하는 일이다. 남을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하고, 그리고 세상사 모든 것을 용서하는 일이 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편제’를 덮고 아련한 책 속의 향기에 취한 이 밤, 나는 문득 남도 행 열차를 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날의 주막은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문명에 덮여 흔적조차 찾기 어렵겠지만, 뚝심 있게 남도 가락을 지키며 그 소리를 통해 한의 매듭을 풀던 여인을, 그 사내를 남도 땅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을 듯도 싶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