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빵맨

수필/교단일기 2007. 4. 10. 09:00

호빵맨

淸羅 嚴基昌
 D고 시절부터 아이들이 부르는 내 별명은 ‘호빵맨’이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얼굴에 양 볼이 붉어 만화영화에 나오는 호빵맨을 닮았단다. 나는 이 별명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별명으로 붙여줬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별명으로 나를 불러주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
 D고에 가던 첫해에 3학년 문과 여학생 반 담임을 했다. 시내의 다른 학교에 비해 성적도 뛰어나게 좋았지만, 극성스럽기도 또한 지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사이좋은 친구사이인데도 질투심은 또 왜 그렇게 많았던지……. 3월 첫날 누군가가 예쁜 꽃병에 꽃을 꽂아놓았다. 다음날엔 어떤 놈이 그 꽃병을 치워버리고 자기의 꽃병에 꽃을 꽂아 놓는다.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가져다 준 쟁반 위의 컵들도 수시로 바뀌었다.
 4월 초였다. 처연하게 지는 매화꽃 옆에서 백목련 탐스럽게 피어나는 오후였다. 부반장 놈이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인형을 하나 들고 왔다. 그때만 해도 처음 보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형이었다. 배는 불쑥 나오고, 얼굴은 호빵처럼 둥글둥글하고, 양 볼은 볼그레하다. 인형을 내 옆에 같다 대더니

  “선생님, 똑같아요.”
  “뭐가?”
  “선생님하고 이 인형요.”

 모여 서서들 기를 죽이려는 듯 까르르 웃어댄다. 나쁜 놈들, 내가 뭐 저렇게 웃기게 생겼다고. 책상에 내려놓는 인형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부정을 했다.
 인형을 갖다 준 것이 음모였다는 것을 나는 다음날부터 금방 알아차렸다. 나한테 혼이 나거나 나로 인해 기분 나쁜 일이 생길 때면 나 몰래 와서 인형을 팼다. 심지어 어떤 놈은 호빵맨 인형의 손목에 세균맨을 채워놓고 갔다. 교무실로 들어오다 호빵맨 인형을 때리는 놈을 보았지만, 나는 못 본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놈들의 애교 있는 반항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잘도 연락을 하더니 졸업 후엔 전혀 소식이 없다. 그놈들이 지어준 별명은 Y고로 건너와 이 곳 학생들도 부르고 있지만 고놈들 소식은 알 수가 없다. 호빵맨 인형을 내 집안의 책상 위에 소중히 간수해두고 아이들이 그리울 때면 어루만져 보며 생각한다. 지금 고놈들 시집간 놈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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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수필/서정 수필 2007. 4. 9. 09:00
 
보리밥

淸羅 嚴基昌
 집 근처에 보리밥을 잘 하는 식당이 새로 생겼다기에 모처럼 외식을 시켜준다고 식구들을 데리고 갔다. 아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 별미로 먹는 보리밥 외식에 대체로 만족하는 눈치였지만, 모처럼의 외식에 큰 기대를 가지고 따라 온 아이들은 불평이 대단하였다.

 “아빠, 왜 이렇게 꺼끌꺼끌해? 이것도 먹는 음식 맞아요?”

 “미끌미끌해서 안 씹어지고 입 속으로 막 돌아다니네. 라면 끓여 먹는 게 훨씬  낫겠다.”

 햄이나 소시지, 라면 등에 길들여진 우리 두 아이들에게 보리밥은 낯설고 거칠어 전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어린 시절은 보리밥이라도 마음껏 먹어보는 게 소원일 만큼 가난하였었다. 겨울이 지나 갈무리해 두었던 곡식은 모두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사오월을 우리 조상들은 ‘보릿고개’라고 이름 하지 않았던가. 누렇게 부황난 얼굴로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던 이 시절엔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뿡뿡 기운차게 방귀뀌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점심도 못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들은 모두 일 나가시고 밥 차려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엌을 기웃거려 보니 시렁에 보리쌀을 삶아 밥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이 있었다. 식구들 저녁거리란 걸 짐작은 하였지만 시장한 판에 조금씩 먹다 보니 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배가 불끈 일어나자 정신이 번쩍 들어 겁이 났다. 일에 지쳐서 돌아와 부족한 저녁밥에 눈을 부라리실 부모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땅거미가 지고 일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올 시간쯤 되어 나는 겁에 질려 뒷논에 쌓아 놓은 짚더미에 몸을 숨겼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는 자식 걱정에 온 마을을 헤맨 부모님이 짚더미에서 부스스 일어나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못 견디게 그리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임이 틀림없다.

 보리밥을 먹어가며 아이들에게 그 보리밥에 얽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마치 옛 이야기나 전설을 듣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우리들 자신조파 풍요에 취해 어려웠던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데, 그 시절 그 가난의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과연 실감이 나는 이야길까?

 요즈음 아이들은 적어도 먹을 것에서만은 그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만큼 가슴 시린 그리운 이야기 거리는 그 때보다 턱없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posted by 청라

해우실

수필/서정 수필 2007. 4. 8. 09:00

해우실(解憂室)

淸羅 嚴基昌
 D 사 입구에 해우실(解憂室)이 있다. 근심이 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록빛 녹음을 배경으로 하여 아담하게 서 있는 이 기와집에 호기심을 품고 들어서면 지린내가 코를 진동한다. 뒷간을 화장실이라 부르다 못해 이젠 해우실(解憂室) 이라고? 미화(美化)도 이만하면 극치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바라보면 찡그린 얼굴로 황황히 들어섰던 사람들이 얼굴을 활짝 편 모습으로 느긋하게 나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이 자비로 중생을 제도하듯이 계곡 냇가에 세워진 이 작은 집 한 채가 등산객들의 걱정을 말끔히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배고픔을 참는 고통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뱃속의 것을 배설하지 못하는 고통엔 도저히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설악산과 동해 쪽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강릉을 출발하여 경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내 성격에 선생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다음 정차하는 곳까지 참기로 하였다.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때만 해도 도로 포장이 안 되어 자갈길에서 차가 뛸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빙빙 돌아 처음 보는 동해의 장관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담임선생님께 발견되어 울진이든가 영덕이든가 어디에서 시원하게 배설하던 그 쾌감! 나는 지금도 그곳  퀴퀴한 화장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치도 우리의 소화기관과 같다. 막히면 답답하고, 풀어줘야 할 때 풀어주지 못하면 큰 아픔을 겪게 된다. 세상이 잘못되어도 바로잡아 줄 어른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굽은 채 자라도 바로잡아 줄 선생님도 많이 줄어들었다. 잘못된 자유의 범람으로 모든 것이 서로 얽혀도 풀어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극도의 이기주의만 남아 교통이 막히고 경제가 막히고 미풍양속도 사라져 가는 요즈음, 누군가 근심 걱정이 술술 풀리는 해우실(解憂室)로 우릴 인도할 수는 없을까.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