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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3시집-춤바위에 해당되는 글 98건
글
고개
장승은
사람 목소리가 그리워
고개 아래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터널이 뚫린 뒤로
인적 끊긴 성황당 고갯마루….
돌탑에 담겨있던 소망들은
장마 비에 씻기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
성황나무는 귀가 다 달았다.
야위어가는 길 따라
추억이여
너도 돌탑처럼 무너져 풀숲에 묻히겠지.
2008. 5.16
글
산사(山寺)
보리수나무 아래 여승이 하나
번뇌의 열매를 줍고 있다.
반쯤 열린
법당 문 사이로
만수향 향내 절마당을 덮으면
염불로 닦여지는 보리수 열매
번뇌의 때
한 겹씩 벗겨지고
탑은 함성으로 일어서고
여승의 얼굴
구름 걷힌 자리
햇살 가루 내어 뿌리듯
반짝이는
입가의 미소
2008. 4.30
글
바람개비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며
바람개비를 돌린다.
이순의 길목에서
반짝이던 사랑을 모아
아픔이 노을처럼 고이는
하루의 끝에 서면
어둠이 내려오는 골짜기마다
눈물로 반딧불은 날아오르고,
바람의 켜켜마다 숨은
세월(歲月)의 이야기로
깃발 펄럭이듯 돌아가는 바람개비.
누구에게 보내는 간절한 노래인가.
저무는 들판엔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도 없고,
시간이 피었다 지는 풀숲 언저리로
이름 모를 들꽃만 고개를 내미는데
기다림의 노래가 곱게 배인
한지(韓紙)의 날개마다
건강한 바람
심지를 세우고
돌려도 돌아오지 않을
새벽을 기다리며
작은 날갯소리 그대 마음에
등대처럼 반짝이도록
모든 것이 비워지는 빈 들판에서
작은 것을
채워주는
바람개비를 돌린다.
글
남가섭암
사바세계 신음소리
가장 잘 보이는 산정 위에
남가섭암
상수리나무 잎 스쳐가는
푸른 바람에
목탁소리를 실어 보내 다독여주고
천수경 자락에 묻은
뻐꾸기 소리
한 모금에도
적막을 못 견디어
제 살 비비는
억새풀 하나
글
봄의 들판에서
초록빛 숨결 움터오는
봄의 들판에 서면
굳게 동여매진 사랑의 매듭이
풀릴 것 같아
내 눈빛이
당신의 마음에
냉이 맛으로 전해질 수 있다면
꽁꽁 얼어붙은
당신의 겨울에
작은 제비꽃 한 송이 피울 수 없으랴.
글
서해
돌을 닦는다.
기름 속에 묻혀있던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난다.
속 빈 조개껍데기와
검은 기름에 찌든 미역 속에 배어있는
어부의 눈물
세월이 갈수록 씻어지지 않는
바위 같은 슬픔이 여기 있다.
눈이 내려서 백장에 쌓여도
덮어도 덮어지지 않는
저 긴 해안선 위의 절망
기름 물로 목욕한 갈매기들은
날아오르다
지쳐서 쓰러지고
하얗게 배를 드러낸 물고기
물고기의 살밑으로 스며드는
저 짙은 어둠
파도는 오늘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서해의 신음을 닦아내고 있다.
.
글
弔 숭례문
유세차
무자 2월 신사 삭
오, 애재라
불꽃 속에 사라진 숭례문이여
미명의 새벽 서울 하늘
붉게 물들인 화광이
사람들의 새벽 꿈밭을 불태울 무렵
나는 들었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가장 소중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를
숭례문이여!
육백년 넘게 우리를 지켜온
너는 역사의 증인.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비껴서 갔다네.
일본놈도 떼놈도
고갤 돌리고 갔다네.
남들도 우러러 피해간
성스러운 가슴에
우리 스스로 불을 놓았구나.
민족의 얼을 살라 버렸구나.
이제 다시 옛모습 다시 세운다 해도
수많은 세월 지켜본 네 기억
사라진 역사는 어이할이거나.
글
<訟詩>
겨레의 스승
김선회 교장선생님의 전년퇴임을 축하하며
엄 기 창
당신은
산바람에 씻기고 씻긴
소나무처럼
올곧은 기개를 지닌 사람
물처럼 부드럽게
바른 곳으로만 흘러 흘러
제자들의 마음도
맑게 씻겨준 사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빛을 세워
세상을 시나브로 밝혀가면서
묵묵히 걸어온 당신의 발걸음은
제자들을 위한 눈물로
사십년을 넘겼습니다.
돌아보면
바람 불고 눈보라치는 고개를 넘어
당신의 삶의 발자국 점점이 찍힌 길
질기디 질긴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당신은 참으로 큰
겨레의 스승입니다.
글
난꽃과 아내
난향(蘭香)은
있는 듯 없는 듯 그윽하다.
창틀 위에 난초꽃 한 송이만 피어있어도
온 집안 비었어도 가득하다.
아내는
있는 듯 없는 듯 따뜻하다.
주방 도마에 칼 소리만 또각거려도
온 집안 비었어도 가득하다.
글
원가계
봉우리마다 구름이 너울처럼
산의 얼굴을 가려주고
골짜기마다 안개는 나삼(羅衫)이 되어
산의 알몸을 가려주네.
기봉(奇峰)은 날아서
학이 되고
폭포(瀑布)는 떨어져
은하수가 되네.
옛날에 신선도(神仙圖)를 보고
관념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오히려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2008.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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